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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사냥

정로즈 2012. 10. 17. 17:40

[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
가을 사냥
 
뒷산 기슭으로 황금색의 쑥국화를 꺾으려고 억새, 실망초, 쇠무릎풀, 도깨비바늘풀 들을 헤치며 간다. 나는 늦가을 산기슭에 피는 쑥국화의 향기를 좋아한다. 쑥향과 국화 향과 분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쑥국화, 도깨비바늘이나 쇠무릎의 씨들이 바지 자락에 달라붙기 때문에 미리 목이 긴 장화를 신고 간다. 멀리 데려다 달라고 떼를 쓰는 그놈들이 귀찮다.

쑥국화의 꽃송이들은 콩알만큼씩 하다. 그것들이 가지 끝에 촘촘히 달려 있다. 그것의 향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꽃을 따다가 말려서 차처럼 우려 마신다. 그것을 가제로 만든 자루에 담아 방안에 걸어 두기도 한다. 나는 차처럼 우려 마시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병에 꽂아서 서재에 놓아 둔다. 그 꽃은 향기를 서재 안에 뿜어 놓는다. 나는 운감(殞感)하는 귀신처럼 킁킁 향기를 맡곤 한다. 꽃의 향기를 맡는다는 것은 사랑하기다. 꽃의 처지에서 본다면 그것은 성적인 폭력행위다. 꽃이란 것은 식물들의 음부니까.

가을 남자들은 싱그러운 여자를 그리워하고, 여자가 없으면 꽃향기라도 맡는다. 가을에는 여자와 남자가 다 외로움을 탄다. 노랗고 빨갛게 물든 단풍 때문이고, 우수수 떨어지는 갈색의 낙엽 때문이고, 소슬한 바람 때문이다.

오래 전에,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은사인 장 그리니에의 ‘섬’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많이 읽혔다. 이 땅에도 인간의 존재를 섬에 비유한 시들이 많이 쓰였다. 여기서 섬은 인간의 절대고독을 말해주는 것이다.

김소월은 인간의 절대고독을 가장 잘 노래한 시인이다. 사람들은 계절 따라 산으로 바다로 몰려간다. 계절의 변화는 사람들을 들뜨게 한다. 들뜨면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가을은 사람들을 유랑하게 한다. 나는 내 영혼이 흔들릴 때, 쓸쓸할 때 김소월의 ‘산유화’를 읊는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의 시는 쉽다. 쉬운 언어들 속에 잔잔하면서도 깊은 슬픔과 절대고독의 아픔과 삶의 순리가 담겨 있다.

이태백의 시 ‘산중문답’도 마찬가지의 경지를 노래한 것이다.

‘…왜 혼자 산에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웃어버리고 대답하지 않지만 마음은 한가롭다.(笑而不答 心自閑·소이부답 심자한)’

그 어떤 사람도 잔인한 시간 앞에 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모두들 늙어가고 죽어간다. 우리 삶의 공간을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의 초연한 담담함은 얼마나 유현한 것인가.

모든 사람이 들썽거릴 때 나는 조용히 침잠하고 명상하며 김소월의 ‘산유화’를 읊는다. 산유화를 읊으면서는 늘 하얀 들국화를 떠올린다. 들국화는 구절초라고도 불린다. 구절초는 여자들의 생리통을 치유하는 데 소문난 명약이다. 어린 시절 나는 늙은 아낙들이 자기 며느리나 딸의 생리통과 자궁의 월경불순을 치료할 목적으로 구절초를 캐러 다니는 것을 보곤 했다.

그것을 솥에 넣고 푹 고면 새까만 물이 나오는데, 그것을 여성에게 장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찬 자궁이 따뜻해지면서 생리가 원활해진다. 하얀 들국화 풀이 생리불순에 명약이라는 사실은 아무래도 신통하다.

서재에서 쑥국의 향기에 취해 있다가 밖으로 나간다. 하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하늘은 나목이 되어 있는 늙은 감나무의 검은 가지들 저편에서 눈을 초롱초롱 뜨고 있다. 지신(地神)의 머리털들이 저 감나무의 잔가지들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하늘은 짙푸르다. ‘짙푸르다’는 말로는 제대로 표현이 되지 않는다. 돌멩이를 던지면 팽 소리가 날 듯싶은 하늘이다. 하늘의 색깔은 향기로운 맑음이다. 아니 형형하다.

한없이 깊은 그 하늘의 텅 비어 있음은 나를 늘 놀라게 한다. 그것은 나의 시원이다. 나는 하늘의 저 텅 비어 있음 속에서 왔다. 죽으면 그 텅 비어 있음 속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내세를 믿지 않지만, 나는 죽을지라도 소멸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 가운데 영적인 것은 분해되어 나의 시원으로 회귀할 거고, 육체적인 것은 비와 안개 되어 삼라만상에 뿌려질 거라고 믿는다. 강물과 지하수로 흘러 사람과 짐승들이 마시게 되고, 수목과 꽃나무에 뿌려져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무량수각(无量壽閣)이라는 현판이 있다. 없을 ‘無(무)’를 ‘无(무)’로 쓴 것에 나는 주목했다. ‘없을 无’는 ‘하늘 天(천)’자를 닮았다. 글자를 만든 사람들이 왜 그 두 글자를 닮게 만들었을까. 무심(無心)은 천심(天心)이라 그렇게 만든 것 아닐까. 텅 빈 마음은 하늘의 마음이고 하늘의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고 가난한 마음은 순백의 마음이다.

가을 들면서 나는 고독을 생각하고, 내 고독한 존재를 생각하면서 늘 하늘을 동경한다. 아마 김현승 시인도 그래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고 노래했을 터이다.

청청 푸른 하늘과 이야기한다. 하늘은 나에게 회귀할 준비를 하라고 말한다. 나는 하늘에게 나의 계절이 늦가을이라고 말한다. 아직도 수확해야 할 작물들이 남아 있다고. 잎사귀들은 무서리로 인해 시들어졌지만, 땅 속에 들어 있는 나의 사랑하는 구근들은 고이 숨어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고.

나는 그 구근들을 다 수확하기 전에는 하늘로 회귀할 수 없습니다. 부디 이 밭의 구근들을 다 수확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그래, 그래 하며 하늘은 웃는다.

[[한승원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