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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30도 오지에서 호랑이를 기다리다
정로즈
2012. 11. 14. 12:11
영하 30도 오지에서 호랑이를 기다리다
박수용 자연다큐멘터리 PD
"20년 가까이 러시아·만주서 시베리아 호랑이 렌즈에 담아
6개월씩 비트에 갇혀 지내다 眼光 빛내며 호랑이 다가오면
그리운 연인 만난 듯 반가워 호랑이는 자연과 세월 앞에서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어줘"
개울을 건너자 잣나무 숲이 우거졌다. 너럭바위에 배낭을 내리고 피곤한 몸을 맥없이 걸쳤다. 향기로운 잣 향이 흘러왔다. 그때 5~6m 앞의 아름드리 잣나무 뒤에서 둥그스름한 무언가가 스르르 밀려나왔다. 멍한 내 시야에 털북숭이 얼굴 하나가 들어오더니 또렷해졌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불타는 듯 깊었다. 호랑이였다.머리가 무척 크고 갈기도 성성하니 풍채가 우람했다. 직감적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수호랑이, '왕대(王大)'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손만 까딱해도 덤벼들 것 같았다. 왕대의 눈빛은 무심한 듯 이글거렸고, 뚫을 듯 나에게 집중되었다. 들킨 자의 눈빛이 아니라 확인하는 자의 눈빛이었다.
왕대가 잣나무 뒤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육중한 전신의 웅자(雄姿)가 드러났다. 왕대는 오솔길까지 사선(斜線)으로 걸으며 입술을 살짝 씰룩였다. 허튼짓 하지 말라는 암묵의 경고였다. 그 씰룩임이 내 몸에 남아있던 기운을 마저 앗아갔다. 바늘에 찔리듯 온몸이 찌릿찌릿하며 심리적 마비 현상이 찾아왔다. 오솔길로 접어들자 왕대는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앞만 보며 잣나무 우거진 오솔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숲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무시당한 기분이랄까? 나는 갑자기 초라해졌다.
호랑이가 없는 문명 속에서 인간은 다른 생물들 위에 신(神)처럼 군림한다. 그러나 인간을 충분히 상대하며 심지어 죽일 수도 있는 존재가 있는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인간은 왜소해진다. 호랑이가 오갔을 오솔길을 홀로 걷다 보면 서늘하고 날 선 기운이 느껴진다.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도 우뚝 멈춰 서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황량한 겨울바람이 산비탈을 쓸어올리기라도 하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이렇게 인간이 왜소해질 때 비로소 자연과 더 깊이 대화하고 세월을 더 넓게 보게 된다. 숲 속의 호랑이는 인간을 자연과 세월 앞에서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존재다.
나는 작년 말까지 EBS에서 20년간 러시아 연해주와 만주, 한반도를 오르내리며 시베리아 호랑이를 조사해왔다. 한 해의 절반은 호랑이의 흔적을 따라 산맥을 넘고 숲을 헤맸으며, 나머지 절반은 아름드리나무 위나 땅굴 속에서 호랑이를 기다렸다. 영하 30도 오지의 한 평짜리 지하 비트에서 씻지도, 소리 지르지도, 불을 켜지도 못한 채 6개월씩 갇혀 지내다 보면 독방(獨房)에 갇힌 죄수가 부러워진다.
호랑이를 기다리는 일은 자신을 기다리는 일이다. 오지 않는 호랑이를 매일 기다린다. 읽은 책을 읽고 또 읽는다. 세상에선 쳐다보지도 않던 녹차통도 비트에선 재미있다. '원재료: 녹차잎 50%, 현미 50%. 내용량: 37.5g….' 물을 끓여 꽁꽁 언 주먹밥 하나를 녹인다. 반찬은 소금과 김, 말린 과일과 육포. 세상에선 이런 맛 저런 맛을 기호에 따라서 가려 먹지만 비트에서는 먹을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읽을거리가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하듯이 말이다.
- ▲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1008is@chosun.com
그러나 얼어붙은 비트 안에서 나를 더 얼어붙게 만든 것은 홀로 있다는 고독감이었다. 끝없는 사막 혹은 심연(深淵)과도 같은 비트 속에서 고독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나를 둘러싼 한 평의 공간이 폐소공포증에 걸린 사람처럼 나를 덜덜 떨게 만든다. 사람은 홀로 사는 동물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종(種)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호랑이를 기다리는 일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구분하게 해준다. 세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비트에서는 사소하고 세상이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비트에서는 중요하다. 본질적인 것과 표피적인 것, 알맹이와 껍데기의 차이를 알게 해준다.
비트는 고개를 들어 유한한 인생의 저 끝을 보게 한다. 힘든 병을 앓거나 죽음이 다가올 때 느끼는 것들을 미리 느끼게 한다. 삶이 아직 남아 있을 때 그 느낀 바를 실천하게 한다. 가만히 있어도 유한한 인생의 저 끝이 시베리아 호랑이의 묵직한 발자국처럼 한발 두발 다가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