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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선의 취재마당

정로즈 2012. 12. 1. 17:53

89세 황금찬, 86세 한운사 선생의 여유 장재선의 취재마당 | 2006-08-22 17:20:35
기자재선  


잡지 시인세계에 황금찬, 김종길, 김규동 시인의 건강법 특별기고가 실렸습니다. 그에 대한 기사를 준비하면서 한운사 선생이 어느 팜플렛에 글을 쓴 것을 우연히 봤지요. 네 분에 대한 인물면 기사를 써놨는데요, 건강 비결로만 가면 문인들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더 인생철학(?)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칼럼을 만들었습니다. 황금찬, 한운사 선생 이야기만 넣어서.

″ 늦어서 미안합니다. 일찍 오려고 집을 나섰는데, 택시 기사 선생님이 저를 엉뚱한 곳에 데려다줬어요.″
황금찬 시인의 말에 방청객들이 모두 귀를 기울였다. 지난 해 가을, 뇌성마비시인들의 시낭송 축제에서였다.
″ 다시 길을 찾아오니까, 택시비가 참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아깝지 않았어요. 좋은 분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설레기만 했어요. ″
초대시인으로 참여한 황시인이 이렇게 말하며 얼굴에 웃음을 활짝 머금자, 방청석에선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는 이날 자작시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를 특유의 정감있는 목소리로 낭송했다. ` 종이 울리네./숲 속에서 새들이 무상을 이야기하네./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소년들은 노래를 부르네.`

황 시인은 새들의 지저귐 속에서도 우주의 무상(無常)을 깨닫는 나이에 이르렀다. 올해 89세. 그가 문예지 `시인세계`(2006년 가을호)에서 특별기고를 통해 자신의 건강법을 밝혔다. 30여년간 교직에 있는 동안 교감, 교장 제의를 고사하는 등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 그가 말한 건강 비결의 으뜸이다. 그는 기자에게 ″ 평생 담배는 피지 않았으나, 술은 젊은 시절에 친구인 조병화(시인) 등과 어울려 무척 마셨다 ″며 ″ 요즘도 반주를 즐긴다 ″고 말했다.

원로문인 중에 호주가(好酒家)로 유명한 이는 올해 85세인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한운사씨다. 그는 최근 월간지 `문학의 집-서울`에 쓴 에세이에서 ″ 수명을 늘리기 위해 약을 남용하지 말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 ″고 말했다. 우회적으로 건강 비결을 밝힌 셈이다.
그는 새까만 후학인 기자와 만나거나 통화할 때마다 ″소주 한 잔 하자 ″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그는 ″요즘도 매일 소주 1병씩 먹는다″며 ″다만 폭주하지 않고, 천천히 마시며 술 기운을 즐긴다 ″고 전했다.
″ 인간도 수목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일 뿐이니 자연이 부르면 그저 따라가야 한다는 대낙관(大樂觀)으로 살아왔는데, 이것에 대해 나를 잘 아는 이들은 대타락(大墮落)이라고 하지 않을까 …껄껄! ″

황금찬, 한운사, 두 원로문인을 만나면 언제나 유쾌하다. 오렌지 향기가 바람에 날릴 때마다 노래를 부르는 소년과 같은 낭만이 그들에겐 남아 있다. 지금도 설레는 마음으로 시, 소설을 열심히 쓰고 있다는 `늙은 소년들`이 삶에 대한 사랑을 읊조릴 때마다, 고령화니 저출산이니 하는 시대의 독기(毒氣)는 저만치 날라가 버린다.
이들의 건강비결은 비슷하다. 스스로 감동에 취할 수 있는, 그래서 대중의 가슴에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작품을 쓰며, 창작 산고(産苦)를 즐겼다는 것. 무엇보다 세속의 출세에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자잘한 계산에 신경쓰지 않으며 대범하게 살아왔다는 것.
그들의 여유와 해학은, 오래 살아 온 사람만이 풍길 수 있는 향기로, 뒤에 가는 이의 마음을 넉넉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