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시인1년 내내
아파트 베란다에 내버려 두었던 화분에서 수선화 싹이 돋기 시작했다. 입춘이 지난 날 우연히 베란다 청소를 하면서 빈 화분을 버리려고 하다가 싹이 돋는 것을 발견하곤 마음을 고쳐먹었다. 싹은 점점 자라 꽃대가 올라오고 나중엔 연노란 수선화가 환하게 피어 올랐다.
베란다 유리창 앞으로 화분을 옮겨 놓고 갓 피어난 수선화를 보고 또 보았다. 맑다 못해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는 수선화의 연노란 꽃빛이 아름다웠다. 수선화는 마치 내가 보고 싶어서, 나를 만나기 위해 어둡고 좁은 화분 속에서도 겨울을 견디고 피어났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난해 봄 영등포 거리에서 꽃대가 막 올라온 수선화 화분을
사서 꽃이 시들 때까지 보다가 베란다 구석에 처박아두고 까맣게 잊고 만 나는 수선화에게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1층인데다 서향(西向)이라 해질 무렵에만 햇빛이 잠깐 들어오기 때문에 베란다에 화초를 두면 잘 자라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꽃망울이 맺힌 동백나무 화분을 옆집에서 얻어와 애지중지했는데, 시들시들하더니만 끝내 죽고 말았다. 그런 내 집에서 어떻게 수선화는 싹이 돋고 꽃대가 올라와 환하게 세상을 꽃피울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뿌리 때문이다. 수선화는 구근(球根)이 있기 때문에 모진 추위와 어둠 속에서도 자신을 꽃피운 것이다. 수선화는 꽃이 진 뒤에 잎과 줄기가 마르면 구근을 수확해 잘 말렸다가 가을철에 다른 화분에 옮겨심기를 해야 이듬해 봄에 꽃이 잘 핀다. 그대로 두면 장마철에 구근이 썩어버릴 수도 있고, 영양이 손실돼 구근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 구근을 옮겨 심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뒀음에도 불구하고 수선화는 피어올랐다. 그것은 구근이 자신의 본분과 본질을 결코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수선화 구근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제서야 꽃이 뿌리로 보였다. 실은 모든 꽃은 뿌리다. 꽃은 뿌리에서부터 피어난다. 뿌리가 꽃을 피우는 것이다. 꽃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뿌리도 아름다운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 사실을 잊고 산다. 꽃과 뿌리를 구분함으로써 꽃의 가치만 소중히 여기고 뿌리의 가치는 마냥 잊고 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꽃은 뿌리의 꽃이다. 뿌리가 바로 꽃이고 꽃이 바로 뿌리다. 뿌리의 노고와
사랑 없이 저절로 피어나는 꽃은 없다.
‘논어’에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이 있다.
그림은 흰 바탕이 있음으로써 그 위에 그릴 수 있다는 의미로, 본질적 갖춤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 어떠한 예술이든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먼저 이뤄져야 창작의 아름다움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본질이라는 뿌리 없이 외양이라는 꽃만 아름답게 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누구나 존경하고 흠모하는 까닭은 조선 선비로서의 본질에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선비의 본질이 모름지기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과 고통을 함께하는 데 있다면 다산 선생은 선비로서의 실천적 본질을 결코 잃지 않았다.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주막에 가면 주막 뜰에 주모의 모녀상이 조각돼 있다. 왜 다산주막에 다산 선생 조각상은 없고 주모 모녀의 조각상만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은 외면했으나 주모만은 귀양 간 다산 선생께 국과 밥을 꼭 챙겨드리며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끼니때가 되면 식사를 함으로써 배고프지 않아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본질을 지니고 있는데 주모는 그 본질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다산 선생으로 하여금 유배생활 중에도 선비로서의 본질적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큰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주모가 다산 선생의 유배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한 것이다.
주모는 다산 선생께 “부모의 은혜는 다 같지만 어머니의 수고가 더 많은데 왜 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해서 아버지의 일가(一家)는 크게 이루는가” 하고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이에 다산 선생은 “아버지는 나를 낳아준 시초다. 어머니의 은혜가 비록 깊지만 하늘이 만물을 내는 것 같은 큰 은혜가 더욱 무거운 것”이라고 답변한다.
그러자 주모는 “풀과
나무에
비교하면 아버지는 종자요 어머니는 토양이다. 종자를 땅에 뿌리는 일은 지극히 보잘것없지만 토양이 종자를 길러내는 공적은 아주 크다”고 말한다.
나는 주모의 이 말에 주목한다. 주모는 토양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뿌리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흙이 없으면 뿌리가 없고, 뿌리가 없으면 꽃이 없고, 꽃이 없으면 열매도 씨앗도 없다는 것이다.
다시 수선화를 바라본다. 수선화 화분에 준 물이 구근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느끼면서 내 본질이 무엇인지 나를 들여다본다. 본질을 숨기고 가식과 허상의 껍질을 두르고 사는 내가 보인다.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에 내가 서 있지 않고, 남이 서 있는 자리에 내가 서 있다. 감사함을 잃어버리고 남과 비교하는 삶을 사는 탓이다. 꽃과 나뭇잎이 떨어져 썩어 뿌리에서 자신을 찾듯 나도 나 자신에게서 나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