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홍대 앞에서 온 편지
정로즈
2014. 11. 13. 18:18
-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홍대 앞에서 온 편지
-
- 김윤덕
- 문화부 차장
- E-mail : sion@chosun.com
- 2년째 파킨슨병과 싸우시는 아버지는 저를 ‘우리 둘째야’라 부르..
- 2년째 파킨슨병과 싸우시는 아버지는 저를 ‘우리 둘째야’라 부르시고, 14년째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남자는 ‘YD’라 부릅니다. 중1 큰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며느리 뒷바라지 하시는 시어머니는 ‘시온 에미야’라 부르시고, 조선일보 ‘新줌마병법’을 즐겨 읽는 독자들은 저를 ‘줌마’라고 부릅니다. 사진 보고 58년 개띠라 오해하는 분들 많지만, 70년 개띠입니다. 스웨덴 연수시절 20개월 된 딸내미 유모차 태워 유럽 10개국 여행한 것이 마흔 생애 가장 고달프고도 행복했던 추억이고, 갑상선에 암 생겨 수술대에 누웠을 때보다 아들녀석 다리 부러져 수술실로 들어갈 때 더 많이 울었던 대한민국 엄마입니다.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도 아닌데, 최근엔 ‘선생님’ 소리도 듣습니다. ‘김윤덕의 맛있는 글쓰기’ 강의 들으러 오시는 40~80대 ‘학생’들과의 만남이 요즘 저의 새로운 기쁨이자 보람입니다.
-
-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만오천원 월급 받는 조교와 결혼해 '서교동 달동네'서 40년을 살았죠… 참 많이 싸웠고, 살 만하니 아파요
어느 날 은퇴한 남편 손을 봤어요… 생각보다 작아 콧등이 시큰했죠
사랑하며 살기에도 짧은 인생입니다
- 김윤덕 문화부 차장
# 서교동 달동네
동네에 '북 페스티벌'이 한창이에요. 남편이 매일 책을 한 보따리씩 사 들고 오네요. 오늘은 사진 공부 하는 아들 준다고 '사랑의 방, 베르나르 포콩 사진집'과 '고흐의 다락방'을 사왔어요. 저는 두꺼운 공책 한 권 사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요. 극동방송에서 10분 걸으면 저희 집이에요. 올해로 40년 살았어요. 열 평 남짓 마당에 배추와 무 심겨 있던 낡은 집이었죠. 돈이 조금 모이면 이곳저곳 고쳤어요. 마당엔 동네 아이들 타라고 그네도 매달고요. 대문 열면 당인리 발전소로 석탄 싣고 가는 기찻길이 보였는데. 철길 양쪽엔 상추, 깻잎 심은 텃밭이 줄줄이 있고요. 돌이 갓 지난 딸아이 끼고 낮잠을 자노라면 기차가 덜컹덜컹 지나갔지요. 낮은 담 너머 우리 아이들 주라고 이것저것 넘겨주던 옆집 영훈이 엄마는 이곳을 '서교동 달동네'라고 불렀답니다. 그곳이 지금은 서울서 가장 번화한 동네가 되었으니 신기하지요? 젊은이들 찾아와 좋기는 한데 밤늦도록 노래하며 담배를 피워 대는 통에 요새 잠을 못 자요. 이사할 때가 된 걸까요?
# 남편의 손
그사이 소식 뜸했지요. 남편이 아팠어요. 간단한 수술이라더니 두 시간 넘도록 소식이 없어 일 났구나 했지요. 병실로 돌아와 다시 짜증내는 걸 보니 마음이 놓여요. 이젠 거의 회복되어 손주랑 그림도 그리고 아이스크림도 사러 나가요. 은퇴 후 마음앓이를 했나 싶어 가슴이 짠했답니다.
1973년 5월 15일, 마거릿꽃 한 다발 안고 1만5000원 월급 타는 조교와 결혼했지요. 며칠 전 내가 "우리 참 많이도 싸웠지? 살 만하니까 아프다 그치?" 했더니 남편이 빙그레 웃어요. 누군가 "남편 손이 멋진 줄 나이 들어 처음 알았다"고 하길래 저도 남편 손을 훔쳐본 적 있어요. 콧등이 시큰했지요. 생각보다 작고, 생각보다 거칠어서. 평생 돈 좇은 적 없고, 누구를 넘어뜨리고 일어선 적 없고, 언성을 높인 적 없던 사람. 그래서 늘 빠듯했지만 남편 덕에 두 아이 반듯하게 자랐다는 고마움이 커요. 하긴 모르죠. 나 몰래 딴짓했을 수도, 호호!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 중2 아들
드디어 중딩 아들에게 소리 지르기 시작했군요. 저는 때리기도 했어요. 새 옷 사주면 친구들한테 벗어주고 오고, 집에 안 와 학원에 찾아갔더니 등록한 사실이 없다고 해서 기함한 적 여러 번이었죠. 당시 유행한 통바지 자락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온 동네를 쓸고 다니길래 세탁소 가져가 밑단이랑 통 좀 줄여달라 했더니 주인이 물어요. "아드님한테 허락받았어요?" 녀석이 하도 느긋해서 "넌 대체 인생의 목표가 뭐니?" 물었더니 "재미있게 사는 거"라고 해서 두 손 들었잖아요. 아들은 그러려니 하세요. 중학교 때 조용하면 대학 가서 사고 쳐요. 그저 엄마 보면 웃게만 해주세요. 사진 공부한 아들은 장가갈 생각도 않고 돌아다녀요. 요즘은 아는 형 잡지 일 도와주고 돈을 버는지 엄마 머리 하얘진 것도 모르고 화려한 색깔 옷을 사다줍니다. "야무지게 모아야지"란 말이 목까지 올라오지만 결혼하면 그리하겠나 싶어 고맙게 받지요. 아들이 행복해 보이니 저도 행복해요. 자식은 그런 거예요.
# 시아버지
곧 추석이에요. 장충동 산꼭대기에 신혼방 얻었더니 시아버님 시간만 나면 찾아와 이것저것 손을 봐주셨지요. 철없는 며느리에게 언제나 "고생한다, 조금만 기다려봐라" 하시며 사랑을 주셔서 동네 분들은 친정아버지인 줄 알았대요. 아들이 교수 되니 "어미야, 네가 복이 많다, 네 덕에 애비가 잘된다" 하셔서 어찌나 송구하던지요. 당신 돌아갈 날 아셨는지 저희 집 오셔서는 아들과 둘이 목욕하고 며칠 후 세상 떠나셨어요. 기일이면 남편은 꽃을 한아름 사와 아버님 사진 옆에 올려놓고 촛불을 켜요. 그리고 밤새 책을 읽지요. 꽃이 질 때까지. 그것이 우리 집 추도 예배랍니다.
작달비 멎으니 바람이 선선하네요. 이번 명절엔 쪼그려앉아 전 부치지 마시길. 나처럼 빨리 늙어요.
※이 글은 이화여대와 극동방송에서 20년간 상담 일을 해 온 수필가 김을란 선생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