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스크랩] 시작법(詩作法)의 작은 비밀 - 정호승

정로즈 2015. 3. 5. 16:12

 

 

 

시작법(詩作法)의 작은 비밀

      ―‘새’를중심으로                                                         




정호승



새가 죽었다

참나무 장작으로

다비를 하고 나자

새의 몸에서도 사리가 나왔다

겨울 가야산에

누덕누덕 눈은 내리는데

사리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새떼처럼 몰려왔다



   잠깐이나마 저의 졸시 ‘새’를 통해 시작법의 비밀을 잠깐 엿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짧은 시도 실은 깊은 체험과 사고의 시간을 거쳐 써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림으로써 한 편의 시가 어떻게 써지는가 하는 점을 서로 살펴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시 ‘새’는 새가 죽어 참나무 장작으로 다비(茶毘)를 하고 있는 상황이 가장 기본적인 상황입니다. 계절적 배경은 겨울이고, 공간적 배경은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입니다. 계절적 배경이 겨울이기 때문에 당연히 눈이 내리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눈은 ‘펑펑’ 내린다고 하는 게 일반적인 표현인데, 이 시에서는 ‘누덕누덕’ 내린다고 표현해놓고 있습니다. 또 ‘새를 다비하고 나자 새의 몸에서 사리가 나왔다’에서 알 수 있듯이 다비의 대상물이 인간이 아니라 새입니다. 나아가 인간의 몸에서 사리가 나온 게 아니라 새의 몸에서 사리가 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에서 ‘이 무슨 거짓말이 있나!’ 하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어느 면에서 보면 비과학적이고 비물리적인 생각과 현상을 말하는 거짓말쟁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시인의 거짓말은 은유의 한 방법으로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의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거짓말’이 바로 시를 만드는, 산문에서 운문이 되는, 육체에 영혼의 생기를 불어넣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이 펑펑 내린다든가 스님의 몸에서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당연함으로써는 시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연한 상식적인 현상과 사실이 시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시는 일반적 상식과 논리를 뛰어넘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러한 ‘뛰어넘기’를 저는 역설 또는 반어라고 표현해봅니다. 시는 곧잘 역설과 반어의 옷을 입습니다. 여러분들은 ‘새를 다비하고, 새의 몸에서 사리가 나왔다’는 구절에서 시의 역설적인 풍경과 장치를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역설과 반어의 세계에서 여러분들은 이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으실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이 시를 다 읽고 났을 때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요? 어떤 사람은 이 시를 어렵다고 합니다.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시를 읽을 때 먼저 시를 쓴 시인이 어떤 생각을 했는가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시를 분석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이해되면 이해되는 대로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대로 그 나름대로 그냥 두십시오. 이 세상에 이해되지 않는 시는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가슴에 와 닿는 그 첫 느낌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썼을까 하는 점을 애써 먼저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들의 생각이 가장 중요합니다. 시를 읽고 처음 느끼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느낌이 바로 시를 이해하는 밑거름이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참나무 장작 속에서 다비 행위의 실체자가 되어 있는 한 마리 새를 떠올리며, 그 새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여러분의 삶의 체험, 그 눈물과 고통, 절망 등을 대입시키시면 됩니다.


저는, 시는 삶의 체험의 바탕 속에서 우러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우리의 삶을 위로하는 것으로서,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도 저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해인사 성철 스님이 입적하셨던 1993년 11월에 『샘이깊은물』이라는 잡지 측의 취재 의뢰를 받고 다비식장에 간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입니다.


다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연화대(蓮花臺)를 만듭니다. 참나무 장작을 세워 쌓고 연분홍빛 한지로 덮어 전체적으로 보면 막 피어나기 직전인 연꽃 봉오리와 같은 모양으로 연화대를 만드는데, 연화대 밑에는 법체를 올려놓는 칠성판 같은 철판이 있습니다. 성철 스님의 법체를 연화대 안에 안치하고 나서는 곧 거화의식(擧火儀式), 즉 연화대에 불을 붙이는 의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저는 성철 스님이 보통 스님이 아닌 큰스님이시고, 인생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아무도 눈물을 흘리며 크게 슬퍼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원택 스님 등 제자 스님들이 연화대에 불을 붙이면서 마치 육친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인간의 슬픔의 어느 한 부분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원영 제자 스님은 큰스님을 다비하는 심정이 어떠냐고 묻자 “다비의 불길을 볼 때마다 그저 아름답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실 다비의 불길이란 한 인간의 시신을 태우는 불길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오후 두 시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은 오후 다섯 시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자 어둠속에서 타올랐는데, 저는 어둠속에 타오르는 다비의 불길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 없었습니다.


11월이었지만 밤이 되자 다비장은 점점 더 추워졌습니다. 처음엔 불길이 너무 뜨겁기도 하고 날아오는 검댕이가 옷에 달려 붙는 게 싫기도 해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이 깊어 점점 추워지자 저도 모르게 불길 가까이 몸을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한 스님의 법체가 타고 있는 그 불길로 추위에 떠는 제 몸을 녹이게 된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처럼 추위를 느낀 사람들이 불길 가까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한 인간의 다비의 불길이 추위에 떠는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새벽 1시쯤 되자 연화대 위의 짚더미는 다 타고 드디어 참나무 장작이 타기 시작했는데, 장작이 타는 모습은 홍보석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숯이 된 참나무 장작 끝이 가야산의 산세와 아주 흡사했으며, 또 장작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함께 타면서 부처님이 서 있는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참으로 신비한 마음에 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새벽 2시쯤 숙소로 돌아와 쉬고 아침 7시쯤 다시 다비장에 서둘러 가보니 성철 스님의 법체를 묶었던 철사와 재만 남아 있었습니다. 인간의 육체가 하룻밤 사이에 재가 되어 없어진 것을 보자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접근을 막은 상태에서 흰 장갑을 낀 스님들이 고요히 사리 수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튿날 저는 사리를 찍은 원색 사진이 1면에 실려 있는 조간신문을 서울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 한 달 뒤쯤 해인사에서 성철 스님 사리 친견 행사를 갖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도록 한 인간의 법체를 태우는 불길이 제게 준 따뜻한 기운이 잊혀지질 않았습니다.


또 한 인간의 육체가 그 아름다운 불길 속에 사라져버린 모습도 제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국 이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시에서 ‘새가 죽었다’는 것은 큰스님이라는 한 인간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경우 ‘인간이 죽었다’라고 쓴다거나 새를 ‘참새’나 ‘굴뚝새’ 등의 구체적인 명칭으로 표현한다면 시의 맛은 사라집니다. 만일 ‘스님의 몸에서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므로 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시는 ‘새의 몸에서도 사리가 나왔다’고 함으로써 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리란 인간의 몸속에서 나오는 고통, 인내, 사랑의 결정체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서는 새의 몸에서 사리가 나왔다고 함으로써 우리에게 시의 신비를 맛보게 하고 있습니다. 또 겨울 가야산에 눈 내리는 모습을 ‘누덕누덕’으로 표현함으로써 한 스님의 생애, 즉 고결하고 청빈한 정신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만일 ‘눈이 펑펑 내린다’라고 했다면 이 시는 제 맛을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는 새의 몸에서 나온 사리를 사람들이 친견하려고 몰려온 상황, 그 역설적인 상황의 순간이 이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새의 몸에 나온 사리를 누가 친견하러 왔습니까? 새들이 온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온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시의 역설의 세계가 숨어 있습니다.


시는 자신의 삶의 작은 부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언어로 표현해보는 문학의 한 장르입니다. 저는 성철 스님이라는 한 인간의 육체를 불태우는 다비의 체험을, 한 마리 새로 은유하고 역설과 반어의 방법을 동원해 시로 표현해보았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여러분들의 삶을 함축된 은유의 언어로 표현하실 수 있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출처 : 화타 윤경재
글쓴이 : 화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