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미련없이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미련없이 비워버린다 -정호승
연꽃이 만발한 여름날, 전주 덕진공원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도심 한복판에 그렇게 큰 연못이, 연못이라기보다는 호수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은 곳에 연분홍 연꽃이 만발해서 혹시 이 지상에서 극락세계를 볼 수 있다면, 연꽃의 바다, 바로 여기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마침 가는 여름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손에 우산을 들고, 보다 가까이 연꽃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연화교 위를 걸었습니다. 대궁이 짧은 꽃봉오리는 연잎 밑에 숨어서 부끄러운 듯 꽃을 피우고 있었고, 대궁이 긴 꽃봉오리는 우뚝 솟은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연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한 송이 한 송이 새벽부터 내뿜기 시작한 연꽃 향기에 취해 골치 아픈 세상사를 한순간에 잊어버렸습니다. 연잎마다 소복소복 담겨 있는 빗방울은 마치 보석 같았습니다. 어떠한 보석도 ‘빗방울 보석’이 지닌 신비한 아름다움에는 견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빗방울은 연잎에 내려앉자마자 자기 몸을 자디잘게 쪼개어 또르르 연잎 속으로 굴러갔습니다. 그러다가 연잎이 몸을 기울여 모인 빗방울들을 쪼르르 아래로 흘려보내면 빗방울들은 미련 없이 연잎을 떠나버렸습니다.
문득 법정 스님 쓰신 글에 밑줄을 그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법정 스님께서는 일찍이 덕진공원 연잎들이 빗방울을 아래로 쏟아버리는 것을 보고,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미련 없이 비워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구절 밑에 정성들여 밑줄을 그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가질 줄만 알았지 비울 줄은 몰랐습니다. 오직 더 가지기 위해 노력해왔을 뿐입니다. 너무 없다고 더 갖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는 있었지만, 이미 가진 것을 버리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연꽃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이면 모일수록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영혼과 육체를 무겁게 짓누르는 물방울을 가볍게 비워버렸습니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가져라!
보면 볼수록 연꽃은 저에게 그렇게 속삭였습니다.
연잎은 빗방울을 비웠다고 해서 한꺼번에 완전히 다 비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두 방울 정도는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얼마만큼 지녀야 제대로 지니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비록 빗방울은 버리지만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다 버리더라도 자기 자신만은 버려서는 안 된다고 일러주는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제가 쓴 동화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사막의 어린 한 선인장이 목이 말라 간절히 비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비가 내렸습니다. 선인장은 너무 목이 말라 빗물을 자꾸 들이켰습니다. 그때 아버지 선인장이 적당히 알맞게 먹으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인장은 배가 부른데도 계속 빗물을 들이켰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인장이 어찌 이렇게 제 자신하고 똑같은지요. 저는 이 동화를 쓸 때 그 선인장이 제 자신인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제가 입으로 먹기만 하고 아래로 똥을 누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소유하고 먹는 일에만 온 마음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두 주먹을 꼭 쥔 소유의 주먹을 지니고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두 손을 쭉 편 버림의 주먹으로 죽어갑니다. 아무리 두 주먹을 꼭 쥐고 모든 것을 지니려고 애를 써도 결국은 두 손을 쭉 펴고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입니다.
두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건운 짐일 뿐입니다. 두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럽겠습니까. 법정 스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욕심은 버려야 채워집니다. 욕심은 욕심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욕심을 채우면 만족을 얻는 게 아니라 불안과 초조, 두려움과 무거움을 얻을 뿐입니다. 만일 연잎이 빗방울에 욕심을 낸다면, 만일 연잎이 빗방울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지니고 있다면 빗방울은 더 이상 그곳에 모일 수가 없습니다. 모였다 하더라도 그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가치없는 인내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니, 인내의 시간을 보내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빗방울의 무게에 짓눌려 꽃대가 부러져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연잎은 빗방울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빗방울을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비가 그치고 나면 빗방울은 대기로 사라져버립니다. 우리가 지닌 모든 소유물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빗방울 사라지듯 사라지고 맙니다. 무엇을 얻음으로써 행복해진다면 그것을 잃음으로써 불행해지고 맙니다. 버리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연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제가 쓴 ‘연꽃 구경’이라는 시에 그런 뜻이 숨어 있습니다.
연꽃이 피면
달도 별도 새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그만 자기들도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나는데
유독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만이
연꽃이 되지 못하고
비빔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생각을 한다
연꽃처럼 살아보자고
아무리 사는 게 더럽더라도
연꽃 같은 마음으로 살아보자고
죽고 사는 게 연꽃 같은 것이라고
해마다 벼르고 별러
부지런히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인데도
끝내 연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꽃들이 사람 구경을 한다
해가 질 때쯤이면
연꽃들이 오히려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가장 더러운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