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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는 글로 완성된다

정로즈 2015. 8. 11. 14:38

[ESSAY] 사랑의 역사는 글로 완성된다

  • 최영애 수필가
  • 名士의 사랑 소식 잦은 이즈음 아내 향한 獻辭 하나쯤 써두고 남편에게 詩 쓰게 하면 어떨까
    소설 닮은 삶을 이미 살았으니 가슴속에 받아쓴 戀書 하나로 사랑은 고귀함을 얻지 않으랴
최영애 수필가
최영애 수필가
 일본 배낭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후쿠오카에서 홋카이도까지의 여정이었다. 기차를 타기도 했지만

 

한적한 시골 풍경을 더 만끽하며 도보 여행을 즐겼다. 간이역에 내려 무작정 걷기도 했고, 작은 마을

 

의 목욕탕에 들어가 할머니들의 잡담에도 귀를 쫑긋 세웠다.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할머니들이 주고

 

받는 말의 어감은 비슷하게 느껴졌다. 낯선 곳의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오모리에서의 기억이 유독 머릿속에 남아 있다. 왜일까. 그건 멋진 풍경에 맛난 음식 때문만도 아니었다.

 

길을 걷다 보면 간간이 노천(露天) 족욕탕을 만날 수 있었다. 쉼터 가운데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이른 아침,

 

한 여인이 그곳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흰색 민소매 블라우스에 핑크색 바지는 종아

 

리까지 접어 올린 채였다. 무릎 위엔 책이 펼쳐져 있었다. 그 옆에서 남자가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노트북에 글을 쓰는 중이었다. 일본인 부부였다. 여행 중인 듯 얌전히 벗어놓은 샌들 두 켤레와

 

여행용 캐리어 두 개가 보였다. 한 폭의 그림이었다. 청신하고도 빛나는 에세이 한 편을 생각했다. 피천득의

 

'인연'에 나오는 아사코가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최근에 'D에게 보낸 편지'라는 책을 읽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사상가이자 언론인 앙드레 고르의 자전적 에세

 

이다. 여든세 살의 작가가 불치병에 걸린 여든두 살의 아내 도린에게 나직이 들려주는 연서(戀書)이자 헌사(獻辭)

 

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오십여덟 해를 함께 사는 동안의 아내에 대한 사랑과 회한이 글 행간마다 녹아

 

있다. '파리 프레스' 등 유수의 언론사 기자에서 주간지 발행인으로 거듭나는 동안 필터 역할을 한 아내가 있었다.

 

그는 거미막염을 앓고 있는 그녀를 위해 파리 교외로 낙향한다. 자연 친화적인 환경에서 이십년 동안 간병하다가

 

한날한시에 아내 곁에 함께 잠들었다. 그의 나이 여든네 살이었다. '어느 사랑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다.


[ESSAY] 사랑의 역사는 글로 완성된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유대인들의 고전 탈무드에 '남자의 집은 아내이다'라는 말이 있다. 고르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결혼이 요구하는 현실로 귀환을 거부했다. 그런데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을까. 사랑이 가장 어려웠다는 그가 "내가

 

나 자신에게서 도망쳐 당신의 전령인 '다른 세상'에 정착할 가능성을 당신은 내게 주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조건의 신뢰와 찬양만이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쓴 '배반자'를 돌아보며 글 속에 아내가 별로 등장하지 않는

 

것, 그녀를 약점이라도 되는 양 표현한 것에 대해 회한에 젖기도 했다. 도린은 "작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글 쓴다

 

는 사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며 남편이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최대한 배려해준다. 덕분에 그는 세상과 모든 대상

 

을 낯설고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며 충분히 몰입할 수 있었다.


폭염 때문일까. 아니면 가슴에 한줄기 긋고 갈 청량한 소식 하나라도 잡고 싶었을까. 이즈음 유독 명사들의 아내 소식과

 

그들의 사랑이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 조간신문에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가 미국 뉴욕에서 타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도 생전에 병든 남편을 수발하면서 비로소 아내가 된 느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백남준도

 

그 시절 아내에게 쓴 편지가 있다. "시게코, 당신은 젊어서 멋진 애인이었고 늙어선 최고의 엄마이자 부처가 됐어"라고 했

 

다. 그의 아내는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지는 게임"이라고 했다던가. 한편 TV 뉴스 화면에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아내 박영옥 여사의 묘소에 놓인 화분 하나가 클로즈업되었다. 리본에 쓰인 것은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구절이다. 평소 이 시구를 좋아해 구애했다는 걸 보면 그도 이 시대의 로맨티시스트임에는 틀림없다.


남편들이여, 아내에 대한 헌사 하나쯤은 미리 저축해두자.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시를 읽게 하고 에세이를 쓰게 하자. 삶 자

 

체가 소설을 살았으니 서툰 한 구절, 결코 말한 적이 없는 닭살 돋는 한 문장이라도 가슴속에 받아쓰기해보자. 당신의 남편

 

은 고르처럼, JP가 되어, 또는 백남준같이 언어의 아티스트가 되어 멋진 문장 하나 날려줄 것이다. "한 번, 단 한 번, 그리고

 

단 한 사람"에게, 당신을 향한 헌사를 고요하게 읊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런 연서를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받는다면? 진

 

부하게만 들렸던 사랑이라는 말이 고귀해지는 순간, 고르의 에세이 첫 페이지 몇 문장은 당신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

 

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