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와 이충무공의 가묘와 청자박물관을 찾아서
장보고와 이충무공의 가묘와 청자박물관을 찾아서
장보고(張保皐)의 주 활동 무대인 청해진(淸海鎭)을 찾았다.
짧은 거리의 목교를 건너면 장도(將島)다.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목책이 드러나 발굴하게 되었고
외성, 내성, 고대(高臺) 등을 복원하였고, 멀지 않은 곳에 높이 30.7m의 거대한 장보고 동상을 건립하고 기념관을 세우는 등
장보고의 업적을 보면서 초등학교에서 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역사공부를 하면서 장보고를 기억하고 있어서
돌아보는 내내 참 좋았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완도타워다. 타워의 높이가 76m다.
강진군 의 완도를 내려다 볼수 있어서 전망은 그만이다.













청자박물관
강진군이 청자를 빚어냈던 고장답게 청자박물관,
청자디지털박물관, 매장 등을 마련해 두었으니 둘러보게 되었다.
특히 국보 청자를 재현한 것도 볼 수 있었는데 국보와 나란히 전시해 두지 않아
비교는 불가하지만 재현품의 솜씨도 놀라웠으며, 매장에서 생활에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청자 그릇들은
눈길과 손길을 끌지만 높은 가격은 지갑을 열기에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매병은 1천만 원 가격이 붙어 있는데 탐낼만하였다.










이충무공 유적지
다시 승차하여 최근 개통한 장보고대교를 건너 고금면 묘당도에 있는 이충무공 유적지로 간다.
묘당도라지만 지금은 섬이 아니다.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의 마지막 본영이 있었고,
명나라 진린의 수군 본거지도 함께했던 곳으로 사적 1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충무공 사당인 '충무사', 관우의 공적을 기리는 관왕묘(關王廟 : 지금은 비석으로만 남아 있다)와 충무공이
전사하자 80여일간이나 가매장했던 월송대 등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따라서 입구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오라는 하마비가 있다.
충무공 유적은 많이 봤지만 관왕묘와 월송대에서의 느낌은 그 옛날이나 지금의나 정세에 따라 정국의 흐름은
변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가매장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서 다행한 일이고, 또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현대에 편리한 환경으로
개조를 하지 않은 점도 다행한 일이다.

















충무공 가묘가 80여일간 안장한 후 충남 아산으로(현충사)로 옮겼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