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운주사 와불님/ 정호승
운주사 와불님/ 정호승
밤늦게 우연히 인사동 찻집에 들렀을 때였다. 모과차를 시켜놓고 다탁에 놓인 공책을 펼쳐들자 대뜸 '와불 일어서다'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한지로 옛 책처럼 제책된 그 공책엔 차를 마시러 온 사람들이 몇 자씩 글귀를 남겨놓았는데, 공책을 펼치자마자 바로 그런 글귀가 눈에 띄었다.
누워 있는 부처가 일어서다니!
와불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란 어떤 상황일까. 와불은 벌떡 일어나 우리들의 뺨이라도 한 대 속 시원히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여기 있는 와불이라면 어디에 있는 와불을 말하는 것일까"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벗이 말했다.
"아이쿠 아직 화순 운주사도 안 가봤구나. 하긴 경상도 사람이라 경주 불국사는 가봤어도 전라도 운주사는 가볼 기회가 없었겠지. 자식. 운주사 석불도 안 찾아가보고 무슨 시를 쓴다고!"
술 탓이었을까. 벗은 나를 질타했다. 나는 벗의 우정 어린 질타를 마음속 깊이 간직했다. 그 뒤 나는 이태가 지나도록 운주사에 가보지는 못하고 <후회>라는 제목으로 운주사와 관련된 시 한편을 쓰게 되었다.
그대와 운주사에 갔을 때
운주사에 결국 노을이 질 때
왜 나란히 와불 곁에 누워 있지 못했는지
와불 곁에 잠들어 별이 되지 못했는지
막상 이렇게 쓰고 나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운주사에 한 번 가보지도 않고 그런 시를 쓴다는 사실이 여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만사를 제쳐놓고 운주사로 가는 길을 떠났다.
운주사는 첩첩산중에 외따로 숨어 있는 절이 아니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내려 들른 외갓집처럼 한가한 시골의 큰 길 한편에 있는 절이었다. 나는 외갓집을 찾아가듯 운주사 경내로 들어섰다. 높은 석벽 앞에 말없이 서 있는 석불들이 먼저 나를 맞았다. 다소곳이 두 손을 가슴께까지 모으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몇 천 년 전부터 간곡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한 여인의 모습이 느껴졌다. 아내를 버리고 고향을 떠나 멀리 도시로 가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지쳐 돌아온 남편을 따뜻한 미소로 대해주는 속내 깊은 여인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나는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석불 앞에 오랫동안 서 있다가 천천히 물 위를 걷듯 조심조심 경내로 걸어 들어갔다. 대웅전 왼편 산기슭 한편에 '와불님 뵈러 가는 길'이라는 나무표지판 하나가 외로이 서 있어 먼저 그곳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와불에 '님'자를 붙여 부르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탓에 나는 맞선이라도 보러 가는 총각인 양 마음이 떨려왔다.
와불은 천천히 10여 분 넘게 산을 오르자 산중턱 바위 위에 누워 있었다. 그저 평범한 석불이 턱을 괴고 깊은 명상에 잠긴 채 옆으로 길게 누워 있는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와불은 집채만 한 바위 전체에다 하늘을 보고 똑바로 누워 있는 형상으로 돌에 새겨진 부처님이었다. 그것도 한 분이 아니라 두 분이었다. 세속적인 생각이지만 그들은 마치 '부부 부처님'처럼 느껴졌다. 바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부처님이 남편 부처님이고, 나머지 부분을 차지한 부처님이 아내 부처님으로 생각되었다. 아내 부처님은 두 손을 가슴께까지 고요히 모으고 살짝 남편 부처님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나는 와불님 곁을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와불님을 둘러싸고 있는 솔숲에서 간간히 불어오는 푸른 솔바람을 들이켰다. 와불님은 너무 커서 발치 부분에 서면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와불님의 머리 부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얼굴 부분이 보였는데, 무엇보다도 단아한 눈매가 감동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불효한 나를 나무라지 않고 그저 인자하게 웃으시기만 하는 내 늙은 어머니의 눈매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순천에 있는 한 암자에서 밤을 보냈다. 잠결에 빗소리가 들려 일어나 창을 열자 비가 내렸다. 신록이 한창인 때에 내리는 봄비치고는 빗줄기가 제법 차갑고 굵었다.
문득 와불 부부님 생각이 났다. 이 빗속에 얼마나 차가우실까. 아마 남편 부처님이 손을 들어 아내 부처님의 얼굴에 내리는 빗방울을 가려주시거나 아니면 돌아누워 아내 부처님을 품에 꼭 껴안고 빗물을 막아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들 와불 부부님은 그렇게 천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란히 누워 서로를 위하고 아끼며 사랑했을 것이다. 나도 누구를 진정 사랑한다면 와불 부부님처럼 변함없는 사랑을 해야 할 것이다.
나중에 서울로 돌아와 책을 읽다가 운주사 와불 부부님이라 미완성 돌부처님인데다 누워 있는 자세가 북극성을 바라보는 자세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더 가슴이 뭉클했다. 그들은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 천년이 지나도록 그렇게 부단하게 노력하고 계신 거였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2001.현대문학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