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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는 왜 춤을 추는가.

정로즈 2010. 3. 3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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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서울의 모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하는 L양을 만난 일이 있다. 그녀는 중간고사를 앞두고 한창 '서양무용사' 교재를 공부하는 중이었다. 그녀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공부를 하기 싫어했다. 그녀는 주어진 시험범위의 내용을 억지로 달달 외우고 있었고 덕분에 나도 그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녀가 읽던 서양무용사 교재에서는 무용의 원류를 매우 시시콜콜하고 빤한 통념처럼 주입하고 있었다.

   그 책에서는 무용의 가장 오래된 형태는 유인원들의 춤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유인원(인간의 조상)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가슴을 두드리거나 마구 뛰거나 울부짖는 행위 등이 무용의 모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식의 역사학적, 실증적 접근은 일단 재미도 없을 뿐더러, 우리로 하여금 '왜 무용을 하는가?'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곤란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럼 우린 원숭이 처럼 춤추고 싶어서 무용을 하는 것일까? 무용을 보는 관객들은 자신들이 잘 못추는 춤을 무용수가 대신 해주기 때문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일까? 이건 좀 아닌 듯하다.  이번  첫 연재글에서 필자는 현재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무용사 강의에 문제를 제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 연유는 대강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최근 발생한 숭례문 화재사건은 몇가지 재미있는 사회현상을 일으켰다. 내내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던 문화재, 국보 등이 최근들어 전 국민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이다. 숭례문이 언제부터, 어떻게 그 자리에 있었는지, 그동안 어떤 역사를 일구어왔는지는 그동안 모두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국보 2호는 무엇일까, 부터 시작해서 문화재 사랑, 문화재 보존, 온갖 포털 싸이트에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독도는 또 어떤가.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만 가끔 들릴 뿐, 독도에 대한 애착이 그토록 열광적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중고등학교 사회,지리 교과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독도가 우리땅임을 꾸준히 외쳐왔다. 숭례문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이며 숭례문에 얽힌 많은 사연들을 국사책에서는 오랜 시간동안 성실하게 알려왔다. 하지만 국사책, 사회책에 나온 독도와 숭례문을 지금만큼 관심있게 읽고 기억해두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교과서 식의 서술은 따분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서양 무용사 교재에서 안나 파블로바의 명언 '엄마 춤은 영혼으로 추는 거야'와 같은 글이나, 이사도라 던컨의 '나는 니체에게서 춤을 배웠다'와 같이 현장감있는 이야기가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안나 파블로바는 그 한마디로 이미 서양 무용사를 통째로 꿰뚫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고, 던컨은 니체의 '초인사상'의 핵심을 자신의 몸으로 승화시키고 언어로써도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무용사 교재에 그런 이야기가 없다는 사실은 퍽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고대그리스로마, 서양중세, 고딕, 르네상스, 로코코, 바로크 따위의 난도질 된 역사적 관점에다가 편리한 대로 끼워 맞춘 무용 역사의 흐름을 그대로 주입당하길 좋아할 무용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작위적 역사관은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예술사적 잡지식을 떠벌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달달 외우는 지식일 뿐이다. 발레리나들은 살아있는 무용 이야기, 그리고 입체적인 무용역사를 원한다. 숭례문이 사람들의 화제거리가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숭례문이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숭례문이 불타버리는 순간, 더이상 숭례문은 교과서 삽화속에 박혀 잠든 따분한 숭례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서 불을 붙이면 불에도 타고, 잘 가꾸면 소중한 문화재가 되는, 살아있는 숭례문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느끼게 된 것이다.

  무용의 원류는 원숭이들의 춤이 아니다. 무용의 원천은 지금 살아있는 인간, 시시각각 가슴으로 뜨겁게 슬픔과 분노와 기쁨과 절망과 애정을 체험하는 인간의 가슴에 있다. 물론 인간의 가슴은 그 오랜 옛날 우리의 조상이 된 원숭이의 가슴과 같다. 그들이 느끼던 기쁨과 슬픔을 현재의 우리 인류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고, 연인의 재회를 기뻐할 줄 아는 이러한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의 가슴이 무용의 원천지이다. 우리는 기뻐서 날뛰기도 하고 슬플때는 몸을 움츠리고 얼굴을 감싼다. 사람들의 삶속에, 모든 동작 속에 무용의 원천이 있다. 서양무용사 교재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용의 원천은 결코 원숭이의 춤이 아니란 얘기다.

 

  발레를 전공하는 L양에게 나는 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L양은 연습실에서 발레를 하며 땀을 흘리는 시간이 제일 즐겁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꽉 끼는 타이즈를 입고 딱딱한 토슈즈를 신고, 때때로 발가락을 다쳐가면서도 연습실에서 발레를 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아주 당연하다. 우리에게 많은 제약과 강압을 주는 사회로부터 연습실은 자유롭다. 그녀에게 연습실은 일종의 휴식처가 되는 듯하다. 연습실 안에서 만큼은 마음대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억압된 욕망과 누적된 정서적 결핍을 얼마든지 표출할 수 있다. 마치 원숭이들이 날뛰듯이 말이다. 그 안에 몇 천년이 넘는 발레의 역사가 담겨있다. 그녀는 살아서 몸으로 발레의 역사를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따분한 서양 무용사를 달달 외울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는 몸으로 알고 있다.

 

 

 

출처 : 핑크빛 토슈즈를 신고
글쓴이 : 베르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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