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236

그리움 / 전윤호

그리움 / 전윤호 군대 간 아들이 보고 싶다고 자다 말고 우는 아내를 보며 저런 게 엄마구나 짐작한다 허리가 아프다며 침 맞고 온 날 화장실에 주저앉아 아이 실내화를 빠는 저 여자 봄날 벚꽃보다 어지럽던 내 애인은 어디로 가고 돌아선 등만 기억나는 엄마가 저기 ―전윤호(1964∼ )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몹시 독특하다. 사랑하는 무엇이 사라질 때 비로소 그리움은 시작된다. ‘없음’을 알지만 간절하게 ‘있음’을 희망한다면 그게 바로 그리운 거다. 부재와 바람, 불가능과 가능, 허전함과 달콤함 사이에 바로 그리움이 있다. 어떤 학자는 그림, 글, 그리움의 어원이 같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부의 주장이래도 시인들에게는 틀림없는 참말이다. 생각을 긁어서 쓰면 글이 되고, 형상을 긁어서 그리면 그림이 되고, 마..

좋은 시 2022.07.10

6월의 시 / 김남조

6월의 시 - 김 남조 어쩌면 미소짓는 물여물처럼 부는 바람일까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언저리에 고마운 햇빛은 기름인양 하고 깊은 화평의 숨 쉬면서 저만치 트인 청청한 하늘이 성그런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은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도 미소하며 부는 것일까 잔물결 큰 물결의 출렁이는 바닷가도 싶고 은물결 금물결의 강물인가도 싶어 보리가 익어가는 푸른 밭 밭머리에서 6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좋은 시 2022.06.05

야생 붓꽃 / 루이즈 글릭

야생 붓꽃 / 루이즈 글릭 고통의 끝에 문이 있었어요.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당신이 죽음이라 부르는 것을 기억해요. 머리 위 소음들, 소나무 가지들이 움직이는 소리들. 그 후의 정적, 연약한 햇살이 마른 표면 위에서 깜빡였어요. 어둔 땅속에 묻힌 의식으로 생존한다는 것, 소름끼치는 일이에요. 그때 끝이 났어요.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영혼으로 존재하면서 말할 수 없는 상태가, 갑자기 끝나고, 딱딱한 땅이 약간 휘었어요. 그러자 내게 새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낮은 관목들 속으로 돌진했어요. 저 세상에서 돌아오는 통로를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 당신에게 말하지요. 내가 다시 말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망각에서 되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되돌아와 목소리를 낸다는 것을, 내 삶의 중심에서 담청색 바닷물에 얹..

좋은 시 2020.10.14

창너머 낙엽이 / 이일기

창너머 낙엽이 이일기 바람 따라와서 우스게 잘 하는 나의 친구야 그리움에 애닮픈 앙금으로 적막한 부두를 난타하고 돌아가는 해일을 보았지. 우리가 가장 연약해지는 저문 서창으로 와서 한동안 허허로이 서성거리다가 추억의 억센 물보래로 빈 창살을 죄 흐려놓고 밤 내 허물어져 가는 뜨락에서 한마당 서러운 춤을 추더니 아아, 서럽도록 서늘하게 돌아서 가는 저 덧없이 긴 옷자락 끄는 소리.

좋은 시 2020.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