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스크랩] 늙어 가는 아내에게

정로즈 2010. 5. 25. 15:32




        늙어 가는 아내에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 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황지우-
출처 : 은혜(恩惠) SUPERSIZED GRACE
글쓴이 : 은혜 (恩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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