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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이 보여준 고향의 비극 -이일기

정로즈 2010. 6. 14. 08:01

 

 

                         1950년 7, 29일 피난민  (2004년 미국 무서기록 보관정)

 

 

 

           이념이 보여준 고향의 비극

                                                           이일기

 

 

  1950년 6월, 내 나이 열셋이었던 그해 여름, 중학교 1학년 학생으로 영어 수업을 받고 있던 시간에 6 ‧ 25 한국전쟁이 발발했음을 알았다. 당시의 입학 신학기가 6월 1일 이었던지라 대구공립중학교를 입학한 지 한달도 안된 때에 비극의 동란을 맞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를 지나 수업 중인데 난생 처음 보는 미군용 트럭이 모교 운동장으로 들이닥쳤다. 그날 이후 모교가 미8군사령부가 되었고 지금도 미군의 주둔지로 이용되고 있다.

  열셋의 어린 나이에 고향 청도에서 이웃의 대구로 온 중학 1학년 학생이었던 나로서는 전쟁이라는 말을 처음 듣던 때여서 전쟁이 어떤 위험과 비극을 지니고 있는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던 때였다.

  멀리서 포성이 점점 가까이 들리면서 그로부터 얼마를 지나 그 포성으로 하숙집 유리창 문이 요동치는 밤녁에도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여름이 깊어 방학을 맞아 고향을 찾게 되었다. 그때 고향에서 비로소 전쟁이 몰고 오는 비극과 참극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런 비극적 참상은 아군과 인민군과의 정구전이 빚어낸 전쟁이 아니라 한마을에서 일생을 함께 살아온 이웃 주민들 가운데 일부 주민이 밤이면 공비로 돌변해 이웃한 주민은 물론 이웃마을 주민까지 무차별 살상하는 그들의만행은 6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예나 지금이나 이상적 국가와 사회건설이라는 환상에 빠져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잘 사는 자, 배운 자 등을 적대시하며 살상을 자행하던 그릇된 이념의 꼭두각시들을 상기하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누구나 아는 바처럼 6 ‧ 25의 전쟁은 한국군 및 유엔군의 전사 실종 포로가 18만 명에 달하고 부상자도 30만 명에 이른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이런 6 ‧ 25의 전란은 많은 문화예술인들로 하여 피난길을 통해 지방도시와의 교류를 체험하는 기회를 부여하기도 했다. 고향 대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부산에 이어 대구 역시 문화예술인의 중심도시였다는 사실도 20대인 50년대 후반에서야 알게 되었다.

  6 ‧ 25는 10대 문학소년이었던 내게 평화롭던 고향 전원 농촌을 피로 물들인 이념의 참담한 살상의 비극을 심어준 전쟁이었다.

 

 

              (文學의 집 . 서울 제104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