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민정 실로암 관현맹인전통예술단원
아르바이트로 학비 벌며 전국대회 최우수상 받았지만 장애의 벽은 높았다
대학 졸업후 오라는 데 없어 악기 팔고 속기사 공부하다 올 초 관현맹인 예술단 합격
장애는 굴레라고 생각했는데 내게 공평하게 기회도 줬다
그날 나는 가야금을 팔아버렸다. 소리할 때 입던 무대용 한복 열 벌도 함께 정리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10년 가까이 익혔던 국악(國樂)과의 이별이었다. 너무나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대느라 하루 네 시간도 못 자고 다닌 대학 시절이 억울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공부해 전국가야금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까지 탔다. 하지만 2008년 대학을 졸업하자 어디서도 날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세상은 온통 흐릿했다. 아버지는 노래를 무척 좋아하셨다. 그래서 우리 집 녹음기에서는 항상 트로트, 팝, 동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덕에 내가 노래를 부르고 듣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엄마는 항상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둘러싸여 박수를 받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를 찾아다녔다.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노래를 부르며 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 것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 TV에서 흘러나온 판소리의 한 대목은 눈물이 날 정도의 떨림과 가슴이 쿵 내려앉는 설렘을 가져다줬다. 나는 국악에 빠져들었다. 다른 친구들이 가요를 흥얼거리고 다닐 때, 나는 판소리 대목을 외우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 가야금 병창으로 대학(목원대)에 진학했다.
중·고교 과정을 다녔던 맹학교와 달리 대학은 쉽지 않았다. 장애가 없는 친구들, 게다가 초등학교 때부터 국악을 접한 그들과 경쟁하기가 버거웠다. 심한 약시(弱視)였기 때문에 악보를 읽거나 그릴 때, 또 책을 볼 때 확대경으로 들여다봐야 했다. 남들보다 두세 배 시간이 걸렸다. 외딴 별에 나 혼자 달랑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소외감이 나를 괴롭혔다.
집안 형편도 넉넉지 못해 내 손으로 학비와 생활비, 레슨비를 벌어야 했다. 맹학교 때 취득한 안마사 자격증으로 매일 밤 9시부터 해가 밝을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늦게 시작한 국악 공부라서 부족한 잠에 시달리면서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소리에 매달렸다. 그러나 대회에 나가면 번번이 떨어졌다. 심사위원들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점수를 줄 수 없다"는 얘기를 공공연히 했다. 벽은 여전히 높았다. 대학 졸업반 때 김해서 열린 전국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는 "기쁘다"는 말 한마디로는 도저히 심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그런데 작년 가을 시각장애인만으로 전통예술단을 설립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향 대구에서 생활을 접고 낯선 서울로 옮겨야한다는 게 부담이 됐다. 또 결혼을 약속한 친구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점도 나를 망설이게 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용기를 줬다. "네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해야지. 내가 도와줄게." 지난 2월 그의 응원을 받으며 오디션을 봤다. 오디션장에서 힘겹게 장애와 싸워온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기적처럼 합격 소식이 날아왔다. 나에게 '관현맹인 사업'은 그렇게 기회이고 희망이 됐다. 장애는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굴레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나는 장애가 힘든 시간을 준 것만큼 공평하게 기회도 줬다고 생각한다.
지난 4월 서울 인사동에서 가진 '실로암 관현맹인전통예술단' 첫 공연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며 판소리 '흥보가'의 '제비노정기'를 불렀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너무 아팠다. 무대에 많이 섰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몸이 먼저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원래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했다.
스물일곱 살 내 꿈은 유명한 연주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음악을 하는 지금 이 순간이 참으로 행복하다. 내가 누군가의 연주를 보면서 느낀 그 작은 설렘을 다른 이에게도 주고 싶다. 그렇게 누군가의 가슴에 남는 연주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