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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사과

정로즈 2011. 9. 9. 17:06

기적의 사과 

홍헌표 

  
   

<기적의 사과>라는 책이 있습니다. 국내에도 번역됐습니다. <이시카와 다쿠지 지음. 영미 옮김(김영사)>

 

 

 기무라 아키노리.jpg

 

이 책의 주인공은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농약도 비료도 쓰지 않고 사과를 재배하고 있는 기무라 아키노리(60)라는 사람과 그의 사과나무입니다. 1978년부터 약 9년에 걸친 시행착오를 거친 그의 무농약, 무비료 사과재배 성공담은 한 일본 사람의 인간 드라마뿐 아니라 스스로 생명력을 유지해가는 자연의 위대함과 우리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무라씨 밭에서 나는 사과는 아무나 먹을 수 없습니다. 너무 비싸서가 아닙니다. 매년 생산 직전 팩스나 엽서로 구입 신청을 받아 기무라씨가 직접 택배로 배달하는데, 생산량이 주문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매년 접수 개시 3분 만에 다 팔린다고 합니다. 그의 밭에서 나는 사과로 만든 스프를 파는 도쿄의 한 프랑스 레스토랑은 1년 뒤까지 예약이 꽉 찼다고 하니 그 맛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 레스토랑 주방장이 사과 하나를 잘라서 보관했는데 2년이 지나도록 썩지는 않고 쪼글쪼글 마른 상태였다고 합니다. 연붉은 빛깔을 띤 채 과자 같은 달콤한 향을 뿜어내면서.

 

내가 이 책을 접한 것은 2009년 5월이었습니다. 대장암 수술을 받은 뒤 이른 바 자연요법을 배우며 투병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첫 페이지를 연 그날 246쪽짜리 책을 쭉 훑으면서 가벼운 흥분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숱한 좌절을 겪으며 자살까지 시도했던 기무라씨의 자연관이 담긴 한 마디 한 마디를 되새기면서,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암세포와 싸우고 있는 제 몸의 세포(자연)에 대한 경외감마저 들었습니다.

 

중학교 동창과 결혼, 데릴사위로 들어가 성()까지 바꾼 일본 아오모리현의 기무라씨는 친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땅 한곳과 장인 땅 세곳을 포함, 모두 6만여평의 사과나무 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냥 남들처럼 방제달력에 따라 1년에 13차례 정도 농약을 치고 비료를 주고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풍요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농약에 과민한 체질이었던 아내를 걱정하던 그는 농한기에 우연히 농촌지도소 도서관에서 접한 책 한 권에 속칭 이 확 꽂혔습니다. 후쿠오카 마사노부(1913~2008)라는 자연농법 창시자의 책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사람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쌀과 귤 재배에 성공한 경험을 토대로 자연농법 이론을 펼친 후쿠오카의 핵심 논지는 이런 것입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완결된 시스템이다. 사람의 도움 같은 게 없어도 초목은 무성하게 잎을 맺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 시스템에 손을 댐으로써 인간에게 편하고 좋은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농업. 비료를 주면 보다 큰 열매를 맺는다. 해충을 죽이면 보다 많은 작물을 수확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비료를 주고 해충을 없애는 방법을 발달시켜 왔다. 그것이 거듭된 결과, 농작물은 자연의 산물이라기보다 일종의 석유화학 제품이 되어 버렸다.’

 

기무라씨는 1977무모한도전을 시작합니다. 첫해에는 모험을 피하기 위해 농약을 6회 뿌리는 곳, 3회 뿌리는 곳, 1회 뿌리는 곳으로 사과나무 밭 네 곳을 나눴습니다. 그 결과 생산량은 좀 줄었지만 농약 안 쓴 것을 감안하면 그런대로 수지가 맞았다고 합니다. 자신감이 생긴 그는 이듬해 모든 밭에 농약을 치지 않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사과는 농약을 안 쓰면 병충해 때문에 수확량이 90%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듬해 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하기 때문에 무농약 재배를 2년만 하면 사과나무는 아예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기무라씨가 맞은 상황도 그랬습니다. 농약을 안 쓰고, 화학 비료를 안 주는 대신 장인, 장모까지 나서서 열심히 벌레를 잡고 밭을 가꿨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벌레를 잡고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흑설탕, 후추, 마늘, 고춧가루, 간장, 된장, 식초, 소금, 우유 등 갖가지 식품을 뿌려봤지만 허사였습니다. “뭔가 방법이 있을거야하며 그가 고집을 꺾지 않는 바람에 장인, 장모와 아내, 두 딸을 포함한 6식구는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야생초를 캐서 죽을 쒀 끼니를 해결할 때도 많았습니다.

 

사과나무는 서서히 말라 죽어갑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 고집을 꺾지 않았던 그는 결국 자살이라는 길을 선택합니다. 보름달이 환하게 뜬 어느 날, 목을 맬 밧줄을 하나 들고 산을 오른 그는 우연히 산 비탈에서 힘있게 서 있는 사과나무를 발견합니다. 사실 그것은 도토리나무였는데 한밤중이라 착각을 한 것입니다. 6년간 찾았던 해답을 얻는 순간입니다.

 숲속 나무는 농약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과 밭과 야산의 차이는 뭘까? 바로 흙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산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물의 합작품인 흙과 인간이 가꾼 사과나무 밭의 흙. 거기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기무라씨는 깨닫습니다. 낙엽과 마른 풀이 몇 년간 쌓이고, 그것을 벌레나 미생물이 분해해 흙을 만듭니다. 흙 속에도 풀과 나무에도 갖가지 균이 존재하고 그들은 상호관계를 맺으며 자연을 이룹니다.

 

기무라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퇴비를 주고, 양분을 빼앗기지 않게 잡초만 깎아 주었다. 사과나무를 주변 자연으로부터 격리시키려 했다. 사과나무의 생명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벌레나 병은 오히려 결과였다. 사과나무가 약해졌기 때문에 벌레와 병이 생긴 것이었다. 식물은 본래부터 농약 같은 게 없어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었다. 그것이 자연의 본 모습이다. 그런 강력한 자연의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과나무는 벌레와 병으로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기무라씨가 할 일은 사과나무에게 자연을 되찾아주는 일이었습니다. 퇴비 주는 일을 그만둡니다. 잡초도 자라게 내버려둡니다. 흙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도록 콩을 뿌렸습니다. 벌레가 모여들고 개구리가 들끓고 뱀이 나타났습니다. 들쥐와 산토끼까지 뛰어다녔습니다. 자연의 먹이사슬이 그의 밭에서 형성되면서 사과나무는 서서히 건강해지기 시작합니다. 무농약을 시작했을 때 800그루였던 나무는 400그루 밖에 살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말라서 고사 직전이었습니다.

 

기무라씨가 사과밭을 자연 상태로 방치 3년 째, 그러니까 무농약 재배를 시작한 지 8년 만에 시들어가던 사과나무 400그루 중에서 1그루가 7송이의 꽃을 피웠습니다. 그 중에서 2개가 열매를 맺었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온 가족이 그 사과를 먹는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그 뒤의 결과는 예상대로입니다. 놀라운 것은 1991년 가을 큰 태풍이 아오모리를 휩쓸어 거의

모든 농가가 사과피해(742억엔)를 입었을 때, 기무라씨의 사과나무는 끄떡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과 열매의 80% 이상이 그대로 가지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뿌리가 다른 사과밭의 나무보다 몇 배 깊게 땅 속에 파고 들어 있는데다 가지와 열매를 연결하는 꼭지가 훨씬 두껍고 단단했기 때문입니다.

 

기무라씨는 자연농법을 따른다며 농약을 안 치고 화학비료를 안 쓰고 벌레를 잡고, 잡초를 제거하는 등 열심히 밭을 가꿨습니다. 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인간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과나무를 자신의 방식대로 가꾸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가 얻은 교훈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애를 써본들 자기 힘으로는 사과 꽃 하나 못 피워.”

 

인간은 사과나무를 농약과 비료에 길들여 놓았습니다. 사과나무는 병충해와 바람에 스스로 견딜 힘을 잃어갑니다. 인간이 조금만 보살핌을 게을리하면 말라 죽을 지경이 됩니다. 인간은 더욱 열심히 농약을 치고, 비료를 주고 땅을 가꿉니다. 그것은 사과나무의 인간에 대한 의존도만 높여줄 뿐입니다. 우리 인간의 몸도 사과나무와 똑같지 않을까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수많은 음식과, 자동차를 비롯한 문명, 그 좋다는 약들, 첨단 의학은 우리를 아주 편안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지만 실은 문명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 놓았을 뿐입니다. 아프면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야 합니다. 영양제를 챙겨 먹어야 안심할 정도가 됐습니다.

 

사실은 우리 인간의 몸은 스스로 생명력을 유지할 시스템과 힘을 갖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제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다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내 몸에 자연의 생명력을 넣어주자.” 40여년간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진 내 생활습관을 싹 바꿔 치우는 일, 그게 건강한 내 몸을 지키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사과나무는 알려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