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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정로즈 2012. 1. 21. 18:31

 

[서소문 포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중앙일보]
정재숙
JTBC 보도국 문화팀장
꼭 5년 전 이맘때 소설가 박완서(1931~2011) 선생을 뵈러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집으로 찾아갔다. 설 언저리라 세배를 드리고 덕담이 오간 뒤였다. 세뱃돈이라며 흰 봉투를 두 개 꺼내시더니 함께 간 남자 기자에게 먼저 건네시며 한 말씀 하셨다.

 “섭섭해 말아요. 우리 집에 온 이들은 다 이렇게 대접합니다. 남자는 한 장(1만원), 여자는 두 장(2만원).”

 명절에 여자가 두 배 이상 고단하기 때문이라 했다. 그의 글과 똑 닮은 태도에 웃음이 나왔다. 고향 따라 ‘개성 깍쟁이’라 뭉뚱그릴 수 있는 야물고 오달진 글솜씨가 곧 그의 평소 생활이었던 것이다.

 박완서의 1주기를 맞으며 그가 남긴 한 구절이 새삼스러운 것은 문단의 큰 어른으로서 고인이 떠난 자리가 더 휑하게 느껴져서다. 선생은 ‘존재가 사라진 후 다른 존재에 남긴 공동(空洞)의 크기가 살다 갔다는 존재증명의 전부가 아닐까’라고 썼다. 피부 깊숙이 삶과 죽음을 한데 보듬고 살아온 이가 남길 만한 글이다. 6·25 와중에 오라비를 잃고, 57세 되던 해 남편과 아들을 잇따라 앞세운 그의 공허감이 사무친다.

 기일을 맞아 발간된 고인의 유고(遺稿) 소설집 『기나긴 하루』에는 그 허무에 허우적거린 아픈 기억이 촘촘히 박혀 있다. 소설 제목 ‘빨갱이 바이러스’는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그의 뼈마디에 스민 골육상잔의 상처가 현재진행형임을 말한다. 아들 곁으로 데려다 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에게 ‘왜 이런 벌을 주셨나’ 항의하고 몸부림치며 절규했지만 “하느님의 견고한 침묵의 변죽도 울리지 못했다”는 고백은 읽는 이를 아프게 만든다.

 그가 비교적 뒤늦은 마흔 살에 등단해 줄기차게 소설을 생산한 바닥에는 이렇듯 피붙이를 잃은 억울함을 세상에 외쳐 고통을 준 이들에게 한 방 먹이려는 복수심이 깔려 있었다. 네가 나에게, 너희들이 우리에게 한 짓을 잊지 않고 있다가 낱낱이 까발려 주겠다는 결기가 넘친다. 박완서의 산문은 고발문학이라 불러도 좋을 대결의식과 힘으로, 흔히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모성(母性)을 넘어섰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선생의 불신과 혐오는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다부졌다는 점에서 더 믿음이 간다. 생전에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을 위한 기부에는 남모르게 첫째였던 그였지만 정치 관련 단체에는 후원금 한 푼 내지 않았다. ‘여야가 편 가르고 흩어졌다 모였다 하면서 서로 제가 옳고 제가 잘났다고 우기는 건 선거철마다 있는 일’이라며 ‘선거는 오락’이라 냉소했으니 후배 문인들이 통쾌해할 수밖에.

 작고하기 몇 달 전에 펴낸 산문집 제목을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한 선생은 ‘못 가본 길에 대한 새삼스러운 미련은 노망인가, 집념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곤 ‘하나의 생명의 소멸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주의 소멸과 마찬가지’라며 이 땅에서 도매금으로 스러져 간 억울한 죽음에 대한 죄의식을 드러냈다.

 선생은 이렇듯 사람 하나, 목숨 하나를 창공에서 반짝이는 별 하나를 쳐다보듯 했다. 인연 맺음의 끈끈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웃는 얼굴조차 울음 참듯 울상이셨던 ‘너무도 쓸쓸한 당신’이었다.

 김광섭 시인이 노래했듯 이토록 정다운 박완서 선생과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떡국 한 그릇을 나누는 설 아침, 마주 앉은 당신에게서 선생을 다시 만나고 싶다.

정재숙 JTBC 보도국 문화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