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1.25 22:59
임형남·건축가(가온건축 대표)
책 '죽음에 이르는 병'을 쓴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늘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여행은 집안에서 손을 잡고 걸어 다니며 상상하는 놀이였다. 그가 무척 문학적이며 감성적인 철학자로 평가되는 배경에는 아마 어린 시절의 상상 속 여행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인간은 상상을 하고 그것을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표현한다. 그 이야기는 철학이 되기도 하고 소설이 되기도 하고 건축이 되기도 한다.
나는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며 주로 집을 짓지만, 책도 여섯권 지었다. 그렇게 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집을 한채 짓고 나면 책을 한권 쓰고도 남을 만큼 이야기가 모이기 때문이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기초를 깔고 기둥을 세우고 벽을 붙이고 지붕을 덮는 물리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가족의 생활을 깔고 가족의 이야기로 기둥을 세우고 가족의 이야기로 지붕을 덮는 일이다. 그 이야기는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땅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건축가는 그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들을 듣고 둘 사이에 끼어들어 통역을 해주기도 하고 중재를 해주기도 한다.
요즘 지어진 지 80년 된 집을 고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래서 자주 그 집에서 자라고 혼인을 하고 가정을 이룬 70대 집주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 집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나이를 먹었으며 어떤 모습으로 남았으면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혹은 팔십을 넘긴 집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어디가 무겁고 어디가 허전하고 답답하고 등등 집은 건축가인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받아 적고 내가 아는 건축의 언어로 열심히 옮기고 있다. 결국 그 집은 끊어지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게 될 것이고, 나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짓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