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애와 자연, 그 겸허한 포용의 시편들
- 안은령 시집「햇살도 그대 위에서...」의 작품 세계
李 一 基
(시인·‘문학예술’발행인)
송계松溪 안은령安垠昤의 본명은 봉태로 경북 영천 출생의 규수閨秀 시인이다.
그는『문학예술』신인상 수상을 통해 등단한 이래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는 시인으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송계 시인은 조금 남다른 데가 있다. 그는 종부宗婦 즉 한 종가宗家의 맏며느리로서 삶을 영위해 온 분이다. 그런 삶의 궤적이 그의 작품 곳곳에 배어있다.
여성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강하고 높은 오늘의 시대에서 볼 때 송계는 고전적 여인의 삶을 살아온 분이다. 종가의 종부로서 살아온 것이 불만 보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살아온 삶을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해서 한 인간으로서 전시대적 요구와 순응에 무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시집의 책 머리인‘시인의 말’을 통해‘힘들어도 내려놓을 수 없는 제 짐을 지고 항해 하면서 피난처로 또는 돌파구로서 나의 시는 부족한 나를 채우기 위한 기도’라고 실토하고 있다. 시인의 시가 노래이기에 앞서 자신을 위한 구도求道의 길임을 말하고 있다.
현대사회에 직면하면서 인간은 기계문명과 물질문명의 편의성의 포만감에 젖어 타인과 나와의 관계에 그 간격의 골이 날로 깊어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일상생활은 물질적 풍요와는 정반대로 정신적 공허와 온정의 궁핍으로 인생의 빈곤을 느끼게 되는 오늘이다. 이런 시대에 시를 생각하고 시를 읽고 시를 쓰는 일은 바로 자기 구원의 길이 아닐까 싶다.
송계 안은령의 시와 문학은 무릇 모든 시인의 작품이 그렇듯 한마디로 뭉뚱그려‘이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모든 시인에 있어 시는 완성이라기보다 새로움을 위한 부단한 도전과 갈구의 모색인 만큼 그 변화의 도전 정신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송계는 도전과 변화를 모색하며 쉼없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는 시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만 그의 시는 시인의 삶에 대한 시선이나 조명이 긍정과 낙관적 인식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에 독자들이 동의 할 것으로 본다.
송계의 시집『햇살도 그대 위에서 반짝인다』는 6부로 나뉘어져 있다. 이런 구분에는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편의상 분류한 것이며 이 시집에는 71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의 첫머리에서 시『아가雅歌』를 만나게 된다.
‘아가’는 말 그대로 사랑의 노래다. 구약성서 중의 한 책으로 남녀간의 아름다운 사랑을 문답체로 엮은 노래가 ‘아가’로 불린다.
사랑이란 대체 무엇인가. 누구나 사랑을 말하지만 정작 사랑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이리라. 그러나 사랑도 세월과 더불어 변형하고 퇴색하며 풍화되고 산화하는 것임을 보게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랑이 주는 절망의 단애에서나 좌절의 벼랑에서도 사랑은 끝내 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인간의 삶 그 중심에 있는 실체요 소중한 생명의 원형임을 송계는 시 아가에서 거듭 재확인시켜 주고 있다.
외롭다는 것은
홀로인 까닭인지요
아니, 사랑받고 싶은 것이죠
추억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남은 기억의
그리움인지요
희망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은
푸르른 삶이
거듭 푸르른 증거이겠죠
소망은 아직도
행복의 울타리에서
자라는 싱그러운 잎새들일 테지요
저는 늘 당신의 울타리 속에서
아직도 푸른 풀잎으로
눈부시고 있습니다.
희망, 사랑, 기쁨, 아니
고독과 고통까지 가슴에 담았다가
하나 둘 죄다 버리고
당신은 떠나갔습니까
불가佛家에선 이를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갈래지어
자연으로 회귀 한다지요
내 모든 허무와 소망을
모두 접고
한낱 가벼운 바람으로
그대 품으로 돌아가려오
『아가雅歌』의 전문
시‘아가’는 7연 26행으로 씌여진 순애보와도 같은 시이다.
이 시에서 주요 모티브는 구원久遠의 사랑이다. 외롬, 홀로, 추억, 그리움, 희망, 행복, 기쁨 등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이 사랑 노래터에는‘사랑받고 싶은’희망이 사라지지 않은‘푸르른 삶’을 증언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행복의 울타리’에 가득한 싱그러운 잎새들도 읽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한다.
‘저는 늘 당신의 울타리 속에서 / 아직도 푸른 풀잎으로 / 눈부시고 있습니다.’
이 시의 5연 세행이 담고 있는 사랑 노래는 한마디 더하고 덜함이 필요치 않는 한편의 애틋한 순애보이기도 하다.
이 시편이 보여 주고 있는 절구는 마지막 연에 있다.
내 모든 허무와 소망을
모두 접고
한낱 가벼운 바람으로
그대 품으로 돌아가려오
인간의 지나온 삶 속에는 허무와 허망과 허실의 과거가 있고, 그 허무에서 벗어나려는 현실의 소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과거라는 지난 날의 허무도 오늘의 바람과 소망의 욕구도 모두 접고 오직‘그대 품으로 돌아가려오’하는 이 절실한 작심은 앞서 지적한대로 시인은 종가의 종부로서 무모한 순종과 순응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그가 긍정과 낙관적 인식에서 살아온 자부심과 긍지를 엿보게 한다.
이같은 긍정과 자부의 심상은 아무에게나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기저나 시의 바탕에는‘체험’의 보석이 깔려있기 마련이다. 그런 체험은 누구에게나 삶의 성숙과 함께 오랜 인고忍苦를 통해서 얻어지는 결정체이다.
이 시를 접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역시 제1부에 수록되어 있는『노부부의 고요한 삶』이다.
이 고요한 삶은‘깊은 적요를 밀어내는 / 바닷가 노부부의 집’에 스며있다. 이 시는 목탄화의 스케치로 그려진 한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하는 시인의 현실을 그려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동해 바다 어느 고즈넉한 주택에서 ‘청아한 웃음 소리’의 손주를 기다리고 맞는 노부부의 고요한 삶이 깊이 각인된 이 시는 3연 13행의 비교적 간결한 시편이다.
모처럼 찾아온
아이들의 청아한 웃음 소리가
깊은 적요를 밀어내는
바닷가 노부부의 집
하얀 담장에
붉은 줄장미가
아이들의 웃음으로 기어오르는
노부부의 바닷가 뜨락에는
뒷산 솔향기가 찾아와
자장가를 부르고
적요가 바다의 파도로 밀려오는 날은
그리운 아이들을 목타게 기다리는
노부부는 수평선 너머를 응시할 뿐이다.
『노부부의 고요한 삶』 전문
이 시의 둘째 연에서 보듯 하얀 담장, 붉은 줄장미, 아이들의 웃음으로 기어오르는 노부부의 바닷가 뜨락은 별다른 수식이 필요치 않는 고요한 삶의 모습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색체의 미학을 대칭적 수법으로 보여 준다. 흰 담장과 붉은 줄장미가 적요 속에서도 생동감이 살아 넘치는 표현기법을 보이고 있다.
오늘 우리의 가정과 가족들이 해체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지적들이 많다. 그런 가정과 가족들 사이에는 사랑과 경제적 이유 외에도 고통을 동반하는 절망과 질병, 기쁨 다음에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낯선 슬픔, 순식간에 밀어닥친 파산과 가족과의 이별, 오랜 친구와의 이유모를 결별, 사랑하던 이와의 알 수 없는 작별, 지난날의 후회 등 인간의 일상 속에는 어둠의 내면세계가 적지 않다.
그러나 시인이 그려낸 삶 속에는 그리운 아이들의 청아한 웃음을 기다리는 그리움이 고요에 고요를 더한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노부부가 당면하고 있는 또 다른 하나의 현실이기도 하다.
시집의 작품 가운데 시인의 현실이 투영된 시편 중 하나가『종부宗婦』이다. 앞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었지만 송계 시인은 종가의 맏며느리이다. 종부라면 먼저 현대산업사회 이전의 여인상을 떠올리게 된다. 옛적 한국의 여인들은 거개가‘홀로’임을 자처해 왔다. 부모 형제는 물론 심지어는 남편까지 타인처럼 바라보고 살아야 했음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여인에게는 막중한 책임만이 벗어버릴 수 없는 등짐처럼 짊어지고 있을 뿐 자신의 존재나 의사와는 무관한 삶을 감수해 왔다. 그 시대 그들의 고통과 한恨을 헤아려주는 시각과 배려는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어머니와 우리의 아내들 우리의 며느리들은 일상의 고통과 한을 식음처럼 감내해 왔다. 그런 시대의 역경을 건너왔을 종부의 시인은 현실에 회의를 갖는다. 그 회의가 바로 자신의 재발견이요 변혁이며 자기존재에 대한 재인식의 변화라고 하겠다.
시 종부의 말미 네 행을 보면 시인의 그런 의식의 변혁과 변화의 외침을 볼 수 있다.
나는
무거운 책임의 종택宗宅을
지키는 종부宗婦의 기품을
갖출 자신이 없다.
『종부宗婦』의 일부
여기서 보게 되는 시인의 외침은 종택의 잡다한 일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전통을 지키고 이을 ‘기품’을 갖출 자신이 없다고 토로하고 있다.
한편 시인이 지닌 자연에의 관조는 단순 명쾌하다. 3연 19행으로 직조된 시『연꽃』은 자연의 한 사물이 지닌 형상과 의미가 시인의 심성과 오버랩 되는 기법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해맑은 하늘 아래
큰 잎새들을 수면에 띄운
그 사이로 내민
자비의 꽃
세상 근심 모두 푸른 잎에 담아
마음마저 넉넉한 넓은 잎새
세상에서 버려진 것 끼리
이빨을 갈며 뒹굴고 아우성치는
저 진흙탕 속에서도
연분홍 고운 웃음을 펼친 그대
햇살도 그대 위에서 반짝인다
오늘 진흙탕 속에서도
청순하게 피어난 연꽃을 보며
부질없이 헤매이던 부끄러운
나를 찾아
어둠을 걷어내 다시 찾은
새 아침의 해맑은 하늘 아래
이슬로 눈을 밝히는
나도 한 그루 연꽃이고 싶다.
『연꽃』 전문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연꽃은 그냥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해맑은 하늘 아래 큰 잎새들을 수면에 띄우고 그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이 시의 첫 연은 꽃보다 잎새의 형상을, 둘째 연은 ‘이빨을 갈며 딩굴고 아우성치는 / 저 진흙탕 속에서도 / 연분홍 고운 웃음’을 펼치는 연꽃의 이미지를 별다른 수식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
셋째 연은 연꽃을 통해 자신에 대한 성찰을 나타내고 있다.‘이슬도 눈을 밝히는’연꽃을 통해‘부질없이 헤매이던 부끄러운 나’를 만나 자신의 정체성이 연꽃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본다.
시인의 시집에는 많은 산을 만나게 된다. 제1부에서 보는『산山』은 3연 11행의 매우 간결한 시편이다.
산은 자석이다.
오르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끌어당긴다.
떠도는 공기, 솔향기까지
그윽한 그대 가슴 속 깊이 파묻힌다.
계곡 물길 따라 추억은 흘러내리고
사람들은 바람처럼 정상에 오른다.
『산山』의 일부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존재 이유를 지니고 있고 제가끔 그 역할을 떠맡고 있다. 보다 큰 슬픔이나 괴로움에 시달릴 때 높고 우람한 산을 찾으면 그 슬픔과 번뇌까지도 수그러든다. 산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두 세계에 위치하고 있다. 천지에 몸을 담고 있는 산은 인간의 번민과 고뇌 따위도 산 속의 풀잎처럼 보듬고 어루만져 준다. 그래서 시인은 산을 가리켜 ‘산은 자석이다’라고 했다.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 끌어당긴다’면서.
산은 초자연적인, 인간의 힘과 분별력으로는 헤어릴 수 없는 무한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동양인의 산에 대한 인식은 인간이 지배할 수 없는 신성존재神聖存在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 그런 존재인식에 의해 사람은‘그윽한 그대 가슴속 깊이 파묻힌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이는 곧 자연과 인간과의 동질성을 나타내며 서로의 동화同化를 뜻한다.‘산은 사람이 되고 / 사람은 산이 되어 교감하는’동질성과 동화관계 말이다.
송계의 시집에는 아름다운 인간의 본성을 보여 주는 시편들은 물론 자연에 대한 관조와 성찰을 노래한 시들이 적지 않다. 특히 사회적 참여의식을 드러낸 시들까지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반겨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줄이고 끝으로 시인의 역작力作 중 하나로 꼽히는『마음의 밭』을 살펴 본다.
우리 모두는 마음의 밭이 있다.
눈을 감고 들여다 보면
마음의 밭이 보인다
심는대로 거둔다는 지당한 진리
진실은 진실을
거짓은 거짓을
사랑은 사랑을
미움은 미움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중략>
산다는 것은 매일의
마음 밭을 일구는 일이다
이 시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마음의 거울과 비유되는 인간 심성의 바탕에 대한 시인의 주문이다.
인간이 지닌 마음의 모습이나 본질은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획일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노래처럼 ‘심는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거듭 말해주고 있다. 즉 우리의 언행이나 삶의 지표는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보여 준다.
진실, 거짓, 사랑, 미움 모두가 작심에 따라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됨을 시인은 명료하게 파악하고 형상화 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삶은 날로 개선되고 성숙되는 변화의 생애임을‘산다는 것은 매일의 / 마음 밭을 일구는 일이다’라는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시는 무엇보다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추구하는 노력의 결정체이며 자유로운 인간 정신의 겸허한 표출이 그 본색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한 시대와 사회를 일탈하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와 인간의 삶을 부단히 성찰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송계 안은령의 시와 문학세계 역시 자연에 대한 겸허와 경탄에서부터 인간생활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경애 등을 폭넓게 포용하고 성찰한 결과의 작품들이 이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이다.
시의 경작耕作에 있어 완전무결한 밭갈이나 수확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예술이나 시의 경작 자체가 완벽한 완성이 없는 만큼 창작에 대한 연마와 열정의 풀무질은 언제까지나 멈춤이 없이 부단히 지속되어야 하리라.
그런 기대는 더욱 눈부신 주옥같은 시편을 담을 제2시집에 더 큰 기대를 가져본다.
송계松溪 안은령安垠昤의 문학과 시 세계에 대한 결론은 간명하다. 시인의 가식없는 겸허한 자연과 인간사에 대한 애정어린 관조와 시인 특유의 긍정과 포용이 그의 시에 잘 구축되고 있다고 하겠다.
≪필자 / 문학예술 출판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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