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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도 불륜도 시간 앞에서는 百戰百敗… 톨스토이에 사랑을 묻다

정로즈 2012. 10. 19. 13:18

[101 파워 클래식] 결혼도 불륜도 시간 앞에서는 百戰百敗… 톨스토이에 사랑을 묻다

  • 김미현 이화여대교수·문학평론가

스물일곱 번째 작품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명사 101명 추천 도서 목록은 chosun.com

김미현이 읽은 '안나 카레니나'
더 짧게 연애하고 더 길게 결혼생활 21세기는 '사랑의 노령화' 시대
'안나…'는 불륜 아닌 실연 소설 풍자 혹은 아이러니… 입체적 해석

'너희는 늙어봤느냐, 우리는 젊어봤다.'

방송에서 처음 들었을 때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이 말 속에는 나처럼 더 이상 젊지 않은 세대들의 항변과 위로가 동시에 담겨 있다. 영화 '건축학 개론'의 유행이 보여주는 첫사랑에 대한 향수도 이런 항변과 위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너무나 미숙했기에 열심히 사랑할 줄밖에는 몰랐던 첫사랑에 대한 '기억의 습작'을 완성해 주는 것도 이런 양가적 감정이리라. 물론 여기에는 맨 처음 사랑만이 첫사랑은 아니라는 현실적인 대안도 제시된다. 그렇다면 늙는다는 것은 첫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첫사랑이 많아진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톨스토이(1828~1910)의 '안나 카레니나'를 더 이상 젊지 않은 나이가 되어 다시 읽으니, '불륜'으로 기억되었던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사실상 그들의 '첫사랑'이었다는 점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단지 첫사랑의 상대를 너무 늦게, 심지어 결혼 후에 만났다면 그들의 사랑은 불륜일까 아니면 첫사랑일까. 중년의 위기가 더 심각한 것일까 아니면 첫사랑의 맹목이 더 위험한 것일까. 첫사랑의 반대말은 마지막 사랑일까 아니면 잊힌 사랑일까. 이런 질문들 속에서 안나의 사랑은 풍자의 화신도 되고 아이러니의 희생양도 된다.

늙고 차가운 남편 카레닌과 결혼한 열정적이고 솔직한 안나는 젊고 매력적인 브론스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결국 안나가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함으로써 파국을 맞는다. 톨스토이는 50세 전후로 작가보다는 교사로서의 삶을 지향한다. '안나 카레니나'는 49세에 완성한 소설로, 예술과 도덕 사이의 갈등이 첨예했던 시기의 산물이기에 안나의 자살 또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 소설만큼 유명한 것이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서로 다르게 불행하다"는 소설 첫 문장이다. 하지만 안나의 자살과 좀 더 관련 깊은 것은 제사(題詞)로 쓰인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는 성경구절이다. 이 문장 속 '나'가 누구인지에 따라 소설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먼저 '나'를 신으로 본다면, 안나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징벌은 인간이 아닌 신의 영역이라는 의미가 된다. 감정의 비만을 경계하면서 도덕적인 다이어트를 강조했던 톨스토이가 신의 이름을 빌려 안나에게 내린 징벌이 바로 안나의 죽음일 수 있다. 이럴 때는 '도덕소설'로서의 면모가 강해진다. 여기서 확대된 해석이 바로 위선적이고 인습적인 상류층 사회가 안나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이와 연관되면 이 소설은 1861년 농노 해방으로부터 1905년 1차 러시아혁명에 이르는 혼란을 배경으로 귀족 계급의 몰락과 자본주의로의 급속한 발달을 문제 삼은 훌륭한 '사회소설'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레닌은 이 소설을 '러시아 혁명의 거울'과 같은 작품이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나'를 안나로 본다면, 이 소설은 불륜소설이 아니라 '실연(失戀)소설'이 된다. 복수의 상대가 브론스키이기 때문이다. 안나가 모든 것을 잃고 유일하게 얻은 것이 바로 브론스키의 사랑이다. 그런데 그런 사랑조차 변한다. 브론스키는 싫증을 내고, 안나는 의심한다. 그래서 안나는 브론스키를 벌주겠다는 복수심과, 이런 극약처방으로라도 그의 사랑을 되찾겠다는 집념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백전백승하는 결혼이 없다면, 백전백패하는 불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결혼이건 불륜이건 시간과의 싸움에서는 모두 백전백패한다는 사실이다. 안나가 부도덕한 유부녀였기 때문이 아니라 변해가는 사랑에 굴복한 약자였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끝난 것이다. 불륜의 사랑이어서 끝난 것이 아니라 모든 (첫)사랑은 끝이 난다.

안나는 소위 불륜을 불륜답지 않게 온몸으로 실천했기에 유죄이자 무죄이다. 이런 안나를 통해 불륜의 품격은 결혼 여부보다 열정의 농도에 좌우된다고 '명백히 부도덕한' 주장을 하거나, 주체적인 현대 여성의 전형을 선취(先取)했다고 '지극히 올바른' 해석을 하는 것은 차라리 쉽다. 반대로 지금 우리가 이 소설을 불편하게 읽어야 하는 이유는 '결혼'과 '더 나쁜 결혼' 사이, '불륜'과 '더 좋은 불륜' 사이의 관계가 더욱 문제시되는 21세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더 짧게 연애하고 더 길게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 '사랑의 노령화' 시대에 노출되어 있다. 이럴 때 다시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안나가 보여준 첫사랑과 불륜, 혹은 첫사랑과 첫사랑'들' 사이의 교차점과 소실점이다. 그러니 '응답하라 1877'.

140자 트윗독후감

"사랑의 굴레에서 좌절하는 카레리나, 삶과 인간관계에서 해답을 갈구하는 레빈, 산고 끝에 얻은 아이에게서 레빈이 느꼈던 연민. 안나 카레니나는 인간에 대한 끝없는 연민에 대한 이야기다." (트윗 응모자 inner_valley)

kidcar215, 페이스북 응모자 SungSoo Ahn, 소효신 Rose Choi 등 다섯 분께는 개별 통지해 선물을 드립니다. 101명 무료 동영상 강의는 휴넷(www.hunet.co.kr)에서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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