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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과 자야 여사

정로즈 2012. 11. 14. 12:44

시인 백석과 자야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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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대원각이었던 이고급요정은 길상사라는 절로 바뀌어, 옛날
요정정치의 주무대로서 화려하게 얽힌 숱한 사연들엔 침묵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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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에 세운서울대 최종태교수의 작품 관세음보살상.
'길상사의 뜻과 만든이의 예술혼이 시절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성모상을 닮은 관세음보살님은 아주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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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7000평에, 1997년 당시 가격 1000억원을 호가 하던 이 대원각을
법정스님께 아무 조건없이 시주해 길상사로 변신케한 놀라운 여인
김영한, 자야여사를 여기에 서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그리고...
백석과 자야...그들의 이야기를.

-청산학원 3학년 시절 사진

백석은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부친 백시박 (白時璞)과 모친 이봉우(李鳳宇)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기행(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연(基衍)으로도 불렸다.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白石으로 활동했다. 아버지 백용삼은
한국 사진계의 초기적인 인물로<조선일보>의 사진반장을 지냈으나,
퇴임 후에는 귀향하여 정주에서 하숙을 치며 생활했다고 한다.

1924년(13세) 오산 학교 입학했는데, 재학시절 오산 학교의 선배
시인인 김소월을 매우 선망했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동문들은 회고한다. 오산학교 졸업후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
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재직했다.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처럼, 문단 최고의 미남으로 평가받던
백석, 그의 멋진 헤어스타일이 그의 감각을 말해준다. 그는 함흥시의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상점에 자주 나가 러시아말도 배웠다.

백석과 김영한의 운명적인 만남은 함흥 영생여고보 재직 중에 이루어진다.
함흥에 와 있던 조선 권번 출신의 기생 김진향을 만나서 사랑에 빠졌는데,
이때 김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진향은 우연히 함흥영생여고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났다.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내 사랑 백석’에서)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둘.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어느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18세때의 자야인 김진향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린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같았다.
나중에 두 사람은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긴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여.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
‘여성’에 발표한 ‘바다’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자야 자신과
관련된 작품이었다고 술회한다.

"....그의 첫인상은 외국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 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과 스물댓밖에 안된 청년이 어찌 그리도 거침없이
'마누라'란 말을 썼었는지... 그가 주로 나의 하숙으로 왔었는데 때때로
그는 만주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손목을
들여다 보며 장난스럽게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하고 웃었다..." -자야의 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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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각시절 건물 일부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차디찼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초례만 치른후도망쳐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오곤 했다.


백석에 의해 자야라 불리웠던 김영한(金英韓, 본명: 김진향,
법명: 吉祥華,1916~1999)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河圭一(1867~1960)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의 꽤나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동경의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었다. 그녀는 몇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기생이기도했다.
그녀는 자신의 글에서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를 포함한 많은
시가 자신을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진위를 알 수는 없으나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라는 부분과 당시 두
사람이 단성사에서 상영하던 '전쟁과 평화'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긴 하다.
그녀는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만학으로 졸업하였으며,
1989년 백석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1990년에는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에는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펴냈다.그녀는 백석과의 사랑을
나누었던 인연으로 1997년 11월 사재 2억을 출연, 백석문학상
(창작과 비평사 주관)을 제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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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극락전에 봉안된 길상화 김영한 영정

백석의 연인 자야는 1987년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월북작가 해금이 되자 1987년 9월, 시인 이동순(李東洵) 영남대 교수는
‘백석 시선집’(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다.
한 달 뒤인 10월,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자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이동순 교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이 할머니를 만나고
자야여사(김영한)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되었다.
자야여사(김영한)는 자신을 찾아온 백석의 까마득한 후배 시인에게
백석이 붙여준 이름 ‘자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한이 많은 사랑의 지난날을 털어놓았다.

이동순시인은 그 때의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 동시에 함흥 시절에 쓴 백석 시의 애틋함과 고뇌와 갈등
따위가 일시에 정동된 풍경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하던 한 선배 시인의 풍모와 체취를
새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에 나는 몹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다.”
이동순 교수는 일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의 생애를 엮어서
‘창작과 비평’에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이 나온 뒤에도 백석의 삶에 대한
미진함과 아쉬움이 남아 자야에게 백석과 보낸 3년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김영한은 1995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출간했는데,
이 교수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의 필치(筆致)로 쓴 원고를
현대적 필치로 바꾸고 부족한 부분은 구술정리로 보완 조력했다고 한다.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로 있던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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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를 짓기전, 대원각을 헌납 받은 초기엔 저런 방갈로 형 건물이
많았다고 기억된다.

생전의 자야 여사(김영한)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詩를 조용히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 한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술회한다.그녀가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원을 출연해 시집을
대상으로 한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작을 발표해 현재 5회를
맞고 있다.
황지우, 최영철, 신대철 고재종등..이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이다.



백석은기생과의 동거를 한사코 반대하는 부모와 장남으로서의 갈등,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백석이 태어난 정주는 이광수, 김억, 김소월 등 문단사적으로 대가들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백석은 반세기 가까이 남쪽과 북쪽 모두에서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시인이었다.
시집도 <사슴> 한 권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이 이토록
수많은 시인들과 문학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토속적인
아름다움을 찾으려 한 그의 노력과 시를 읽을때마다 묻어나오는 솔직함과 서민적(방언)이고도 아주 서정적인 시를 백석만의 언어로 쓴 이유가 크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다.
이것이 자야에게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해방되자
북한에 눌러 앉았고 자야는 서울 대원각 여주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목의 어느 신의주 변방에서 1948년 잡지‘학풍’에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 인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이 작품이 서울로 보내져 '학풍'에 실리게 됨으로서
백석이 서울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그당시 백석의 단절된 심경이 절절히 배인 이 시는 지금
많은 시인들의 애송시가 되었다


백석은 월북작가가 아닌 재북 작가였다. 고당 조만식선생의 비서로
그는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번역하며 북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 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백석은 1995년 1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내가 백석이 되어--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오는 날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설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놓고 간 그녀의 스무 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참고 글: 旻影 '시인의 시인 백석' 중,
이생진 '백석의 유지에서진정한 시의 길을 읽으며'
자야여사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1995)
'수능 시인’백석과 기생 자야의 비련의 사랑/조성관 주간조선차장대우
"백석, 내가슴속에 지워지지않는 이름,자야여사의 회고/
이동순" 중


Scrap: 파아란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