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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30년 '짝사랑'에 대한 고백

정로즈 2014. 9. 22. 14:40

내 30년 '짝사랑'에 대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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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처럼 내게 다가온 브리지 게임
    워런 버핏, 오마 샤리프, 빌 게이츠…
    '열중하면 누드 美女에도 관심없어'
    全세계 1억 넘게 즐기는 두뇌 스포츠
    끊임없이 뇌 자극해 치매도 예방
    초고령화 시대 저비용 복지의 대안

    이강원 세계장신구박물관장·시인
    이강원 세계장신구박물관장·시인
    30년 전 그는 운명적인 사랑처럼 내게 왔다. 불륜으로 끝날지라도 내디뎌야 하는, 피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 빠져드는 늪 같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30년이 흐른 지금 그와의 사랑은 조금도 식지 않은 채 나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 끊임없이 도전하게 만든다.

    그는 '브리지 게임(Bridge game)'이다. 대책 없는 짝사랑이지만 그나마 이 상사병은 동병상련의 동지가 많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세계 130여 개국에 나처럼 '브리지 열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1억명을 넘고 있다. 중국을 재탄생시킨 등소평과 미국의 아이젠하워 전(前)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전 총리를 비롯한 지도자들, 세계 최고의 부자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 영화배우 오마 샤리프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소설가 서머싯 몸 등이 일찍이 브리지에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브리지의 포로(捕虜)로 살기를 선택했다.

    워런 버핏은 "마음 맞는 브리지 플레이어 4명만 있다면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도 불평하지 않겠다" "브리지에 열중할 때 어떤 미인이 누드로 내 앞에서 행진한다 해도 내 주목을 끌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서머싯 몸은 "인간의 지혜가 고안해낸 가장 재미있고 지적인 게임"이라고 했다. 오래전부터 프로 브리지 플레이어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오마 샤리프는 "연기는 나의 직업일 뿐 내가 가장 열정을 쏟아 붇는 것은 브리지"라고 했을 정도니, 나의 30년 짝사랑은 대단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52장의 카드로 플레이하는 브리지가 뭐길래 이토록 수많은 이의 가슴을 평생 뜨겁게 달구어 놓고 피멍 들게 하는 것일까. 브리지 게임은 체스·바둑과 함께 인간의 지적 능력을 부챗살처럼 펼치게 하는 게임으로 기억력·분석력·판단력·소통능력·도전정신의 '오두마차'가 모두 질주하듯 달려야 한다.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는 것이 필수여서 심리 분석과 상대의 실수에 대한 너그러움 등도 필요하다. 잘 맞춘 퍼즐처럼 파트너와 교감이 적중할 때는 마치 영혼의 지축이 흔들리는 오르가슴을 맛본다.

    [ESSAY] 내 30년 '짝사랑'에 대한 고백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52장의 카드가 만들어내는 조합은 63억여개나 되어서 매번 새로운 도전의 스펙트럼을 제공한다. 평생을 해도 같은 조합의 카드는 만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마치 천만 겹의 꽃잎을 가진 연꽃처럼 꽃잎을 열수록 깨달음의 깊이가 더해간다. 굽이굽이 숨겨진 진실과 재미가 많아서 아무리 캐내도 깨달음의 광맥이 마르지 않는다. 브리지를 하다 보면 때로 나의 뇌가 "고마워!" 하고 속삭이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이미 구미 선진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선 브리지가 대중화된 지 오래다. 특히 두뇌 게임도 스포츠로 인정되어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2002년 동계올림픽에서 시범 종목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중국은 바둑·체스·장기 등과 함께 브리지를 두뇌 스포츠 종목으로 인정, 2009년 마인드스포츠올림픽(MSI)을 개최하기도 했다. 중국과 폴란드에서는 초등학교부터 특별활동 시간에 브리지를 가르치고 뛰어난 학생에게는 대학 특례 입학까지 시켜줄 만큼 브리지를 장려하고 있다.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사고는 물론 사회 적응 능력 향상과 기억력 증강에 협동심, 조율과 협상의 능력을 모두 브리지 테이블에서 두루 익히고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리지 게임을 할 때면 여전히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총기를 유지하고 있는 94세의 미국 친구 헤리옷은 브리지가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숲에서 벗어나는 여권이라며 브리지 전도사가 되라고 내게 늘 독려하곤 한다.

    13세기 유럽에서 창궐했던 페스트처럼 21세기의 우리는 '치매'라는 새로운 전염병의 공포에 직면하고 있다. 현재 15분마다 1명씩 새로운 치매 환자가 발생하고 있고 2024년에는 100만명, 2041년에는 20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연간 사회적 비용도 10조원이 넘는다. 치매는 개인이나 가족의 불행을 넘어 심각한 사회적인 위협이다. 브리지 게임을 시작하는 것은 치매 예방 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같다. 뇌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춤추게 해서 뇌가 굳어질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신체적·정신적·정서적 효과를 모두 볼 수 있는 다차원적 치료제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의 브리지 인구분포도를 보면 영국은 15명 중 1명, 네덜란드는 40명 중 1명, 중국은 30만명 중 1명, 일본은 1만명 중 1명이 즐기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40만명 중 1명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초고속 고령화 사회 진입은 100세 장수 축복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당국도 이 문제를 해결할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나는 브리지 게임의 스포츠화를 제안하고 싶다. 고스톱 바람을 브리지 게임으로 돌리면 어떨까. 국민의 뇌 건강 증진은 물론 저비용 복지정책의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다.

    선진국에선 '브리지 컬럼'을 게재하지 않는 신문이 없다. 우리도 신문에 브리지 컬럼이 등장하는 날 전국에 '치매 차단기'를 설치한 셈이 될 것이다. 브리지, 내 사랑! 그를 짝사랑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라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