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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겨울은 왜 예술가들을 끓게하나?

정로즈 2014. 11. 13.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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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과 겨울은 왜 예술가들을 끓게하나?

  • 김기연
    카피라이터
    E-mail : hatssal7@hanmail.net
    캘리그라피 작업을 하면서 사진을 찍어 전시를 하거나, 직접 디자..

내복을 꺼낼 때가 왔다. 창피스러워 입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도, 여유도 없다. 소매 밖으로 삐죽거리지만 않는다면 꽤 괜찮은 물건이다. 두툼한 겉옷에만 의지하기에는 이 겨울이 참 매섭고 독해졌다. 춥고 눈이 잦으니 잊었던 고드름이 도심에 나타났다.

참, 반가운 얼음막대다. 지붕 위에 쌓였던 눈이 겨울 햇살에 살금살금 녹으면서 고드름이 태어난다. 어린 날, 고드름은 내게 과자 같은 것이었다. 맛있어서가 아니라 오도독 깨무는 재미 때문이었다. 코와 귀가 빨갛게 얼어붙는 요즘은 따스한 집이 낙원이다. 열대지역의 해변보다 더 안락하고 좋다.

따스한 집으로 들어서면서 두툼한 겉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며 어떤 음악을 들을까 고민하다가 앨범 커버에 고드름 사진이 박혀 있는 Paul Desmond의 ‘Summertime’를 떠올렸다. 이렇게 추운 날에 왜 하필이면 차가운 고드름이냐고 심드렁한 목소리를 뱉어보지만 검은 레코드는 벌써 턴테이블 플래터 위에 냉큼 올라앉았다. 어쩌면 나는 이미 뜨거운 여름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 겨울도 깊어지지 않았는데 벌써 여름 욕심이라니.

후텁지근한 여름 잊게 하는 상쾌한 겨울 같은 뮤지션 폴 데스몬드
Paul Desmond / Summertime (1962) / CTI
Paul Desmond / Summertime (1962) / CTI
하늘거리는 듯 아름다운 알토 색소폰 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운다. 폴 데스몬드. 그는 ‘알토 색소폰의 음유 시인’이지 않은가. 그의 연주는 짙은 열대의 온기를 풍기며, 탐미적이면서도 경쾌하다. 딱딱하게 굳었던, 차갑게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이는 따스한 한 줄 문장 같다. 그런 까닭에 이렇듯 추운 날에 데스몬드의 달콤하고 발랄한 연주가 그리운 것이리라.

1924년 미국 San Francisco에서 태어난 그는 샌프란시스코 고등학교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에서 클라리넷을 배웠으나 이후에 알토 색소폰으로 전향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 Dave Brubeck을 만난 건 군대에 있던 1944년 일이다. 이 우연하고도 당연할 것 같은 만남으로 그는 17년간 Dave Brubeck Quartet의 멤버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그룹은 1951년 피아노에 데이브 브루벡, 알토 색소폰에 폴 데스몬드, 더블 베이스에 Bob Bates, 드럼에 Joe Dodge를 멤버로 하여 결성되었다. 브루벡 쿼텟은 빠른 템포와 격렬한 즉흥연주를 특징으로 하는 bebop, hard bop 재즈의 반발로 탄생한 cool jazz의 대표격이었다.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멜로디와 사운드 덕분에 대중의 귀를 사로잡는데도 성공했다.

데스몬드는 끊임없는 멜로디와 재기 넘치는 연주, 투명하고 아름다운 알토 색소폰 음색으로 브루벡의 피아노 스타일을 돋보이게 했다. 가볍고 경쾌한 그의 연주가 묵직한 브루벡의 연주와 멋진 조화를 이루었던 까닭이다. 어떤 평론가는 ‘브루벡과 그의 알토 색소폰 파트너인 폴 데스몬드는 거의 몽유병자와 같은 직관으로 서로 부추겼다’고 할 정도였으며, 때로 비평가들로부터 브루벡의 피아노 연주보다 그의 연주를 더 높이 평가받기도 했다.

그는 작곡가로서도 상당했다. 1954년에는 오드리 헵번에게 경의를 표하며 ‘Audrey’를 만들었으며, 1959년에는 쿨재즈의 상징적인 곡이라 할만한 ‘Take Five’를 작곡하여 데이브 브루벡 쿼텟을 인기 그룹의 반열에 올려 놓기도 했다.

그의 솔로앨범인 ‘Summertime’은 1968년 말에 녹음되어 그 이듬해인 1969년에 발매되었다. 이 뛰어난 앨범은 그 당시 젊은 뮤지션인 Herbie Hancock(piano), Ron Carter(bass), J.J. Johnson(trombone) 등이 참여해 관심을 증폭시켰으며, 커버 사진 속 고드름이 상징하듯 청량하고 시원한 사운드로 대중들에게 매력을 어필했다. Beatles의 ‘Ob-La-Di, Ob-La-Da’와 같이 경쾌한 리듬의 곡도 있고,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차분하게 만드는 J. Mandell의 ‘Emily’, 한 여름 밤의 감성과 선율이 물씬 풍기는 George Gershwin이 작곡한 ‘Summertime’ 등이 수록되어 있다.

데스몬드는 알토 주자로서 코니츠 계열에서 특히 성공적인 인물이었으며, West Coast의 쿨재즈 대표 연주자로 가장 인기 있는 뮤지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그룹에서는 물론, Gerry Mulligan이나 짐 홀, Chet Baker와 같은 주요 연주자들과 협업작업을 하기도 했다. 1964년 게리 멀리건과 작업한 앨범은 그가 만든 가장 훌륭한 레코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매일 술을 달고 살던 애주가이자, 하루에 3갑씩 담배를 피우던 그는 1977년 폐암으로 생을 마쳤다. 늘 두툼한 안경을 쓰고 다니던 그는 내성적인 성격과 달리 연주에 있어서 만큼은 매우 긍정적이며 따스하고 밝았다. 열정적이고 격렬한 이전의 재즈 스타일에서 벗어나 삶 자체를 즐기는 듯한 그의 연주는 냉혹한 삶을 녹이듯 감미로웠다. 그것이 그를 지탱케 하는 생의 목적이고 음악을 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러시아를 너무나 사랑한, 겨울을 너무나 좋아했던 Boris Kustodiev

감미로운 연주로 세상을 부드럽게 안았던 폴 데스몬드가 있었다면 한없이 투명하고 따스한 애정을 그림에 담아 세상을 보듬었던 이가 있다. 바로, 보리스 쿠스토디예프. 살짝 낯선 이름이지만 아름다운 겨울 명화를 많이 남긴 화가다. 그는 러시아의 전통 문화와 축제, 아름다운 자연 풍광, 상인들의 일상을 밝고 화사한 색채와 질감으로 표현했으며, 그것은 그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삶에 대한 사랑, 행복감, 즐거움, 러시아적인 것들 그 자체였다.

서정적이고 인간적인 정감이 묻어나는 그의 화풍은 러시아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놀라운 인상을 남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런 그에게 1905년 발발한 러시아혁명은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지만,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Boris Kustodiev / Frosty Day, 1916 | Oil on canvas | The A. N. Radishchev Museum of Arts, Saratov, Russia
Boris Kustodiev / Frosty Day, 1916 | Oil on canvas | The A. N. Radishchev Museum of Arts, Saratov, Russia
실패한 혁명처럼 그에게도 곧 시련이 들이닥쳐왔다. 1916년에 앓은 결핵으로 하반신 마비가 온 것이다.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된 시련조차도 그를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그는 여전히 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즐겁고 생동감 있는 삶을 그리기 위해 붓을 들었다.

휠체어 없이는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갈 수도 없음에도 말이다. 비록 자신의 다리로 거리와 들판으로 나갈 수는 없었지만 그는 가난하고 힘든 지난 시절의 즐거웠던 러시아의 명절과 봄이 오기를 기원하는 축제, 눈이 덮인 아름다운 겨울 정경과 상인들의 삶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 기억을 화려한 색채와 생동감 넘치는 활기로 생생하게 되살렸다. 여전히 자신이 사랑하는 러시아와 러시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삶에 대한 애정이 있었으므로.

마슬레니차 화요일(Maslenitsa Tuesday, 1916), 볼셰비키(Bolsheviki, 1920), 볼가강(The Volga, 1922) 등 대표작품에서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작품에 러시아의 속살을 담았던 그는 1927년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그는 시대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결코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언제나 밝고 화사했다. 희면서 푸른 눈과 울긋불긋한 건물들, 나무들과 행복한 몸짓으로 거리를 쏘다니는 사람들이 담긴 그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폴 데스몬드의 ‘Summertime’ 앨범 커버 속 고드름이, 한 여름의 노곤함을 깨트리는 알토 색소폰 소리가 울려 나오는 듯 하다.

쿠스토디예프는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품고 있었으며, 그것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았다. 물론, 그것이 그의 그림이 지향하는 유일한 주제였음은 자명하다. 이러한 그와 달리 자신의 삶을 스스로 자책하고 검열했던 화가가 있다. 한 겨울의 풍경처럼 적막하고 삭막한 날것의 몸을 통해 삶에 대한 불안과 슬픔을 오롯이 드러낸 Egon Schiele가 바로, 그다.

불온한 삶, 그 삶이 지닌 불안을 몸을 통해 표현한 에곤 실레

Vincent van Gogh가 죽기 한달 전인 1890년 6월에 오스트리아 비엔나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918년 비엔나에서 28세로 요절한 에곤 실레. 데생의 천재이자 격렬한 표현주의 화가인 그는 일찍부터 뛰어난 드로잉 감각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그에게도 삶의 불안은 일찍 찾아왔다. 15세가 되던 해에 매독으로 고통 받던 끝에 미치광이가 되어 죽어간 아버지를 사춘기인 어린 나이에 직접 목격해야만 했다. 그 시절, 아버지는 그가 공부를 하지 않고 그림만 그린다며 그림을 불에 태워버리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깊은 상처였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그는 육체를 두려워하고 혐오하면서도 한없이 사랑했다.

그의 그림 대부분이 강렬하고 에로틱하며 퇴폐적이고 쓸쓸하며 한없이 깊은 연민의 골짜기 속에 들어앉아 있는 듯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그의 주요 소재는 사람이었다. 여자와 아이들, 주변 인물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에곤 실레 자신이었다.

16살 때 그는 의도하지 않게, 어쩌면 당연하게도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로 진학하여 1906년부터 1909년까지 공부를 했다. 1년 후인 1907년, 그의 드로잉을 선배 화가였던 Gustav Klimt에게 보여주게 되고, 클림트는 그의 비상한 재능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실레의 그림을 구입하거나 자신의 그림과 교환했으며, 그림상에게 그를 소개시켜주는 등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그에게 클림트는 숭배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거대한 영향이었다. 그 영향으로 그는 전통적인 회화방식을 버리고 장식성이 강한 화풍으로 스스로를 변화시켰으며, 1910년경에 이르러서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11년, 그는 그림에만 몰두하기 위해 비엔나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인 보헤미아 크라마로 이주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생활은 그리 조용하지 못했다. 그의 생활 방식부터 여인들이나 모델과의 관계로 인해 이웃들과 불화를 겪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비엔나와 뮌헨, 쾰른, 그리고 부다페스트 등에서 전시를 하며 화가로서의 명성이 쌓아가던 중에 그의 모델이었던 소녀의 고발로 감옥에 24일간 감금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더욱 깊은 상처를 남기며 이후의 그의 성격과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후부터 그는 은둔자처럼 지냈으며 스스로를 수도승이나 은둔자로 표현한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Egon Schiele / The Loving, 1917 / Oil on canvas / 100 X 170 com / Austrian Gallery Belvegere
Egon Schiele / The Loving, 1917 / Oil on canvas / 100 X 170 com / Austrian Gallery Belvegere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레는 미술품 수집가와 메세나의 지원을 받아 비엔나 표현주의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뛰어난 데생을 구사하는 그의 작품 속 윤곽선은 날카로우며 관능적이고, 인체의 성적 부분이나 겨울 나무와 같이 묘사된 육체, 복잡하게 뒤엉킨 몸 등을 묘사하는데 힘을 쏟았다. 윤곽선은 클림트처럼 장식적인 방향이 아닌, 표현주의적인 격렬한 감정을 표출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더불어 사랑의 즐거움과 슬픔을 프로이트 식으로 분석하여 표현하고자 했다.

분석적인 그의 그림을 보면 마치 그림 속 인물이 품고 있는 삶의 본질이, 진실이 전모를 드러내듯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런 느낌들로 인해 그의 그림들은 화려함보다는 삭막함으로 가득 차 있고, 강렬한 외곽선과 뒤틀린 신체, 원초적인 성의 표현이나 묘사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선들로 인해 긴장감과 열정을 느낄 수 있으며, 동시에 애잔한 슬픔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의 자화상과 데생에는 인간의 절대적 고독이 겨울 나무처럼 오롯이 보인다.

그러나 또다시 삶이 그의 뒤통수를 쳤다. 제 1차 세계대전 말에 번진 악명 높은 독감으로 임신 6개월이던 아내를 잃었고, 사흘 뒤에 그 역시 독감이 감염되어 아내를 따라 나섰다. 그의 나이, 28세 때 일이다.

혹독한 겨울이 오면 차라리 찌는 여름이 그립고, 후텁지근한 여름이 되면 시원한 겨울이 욕심나는 게 인지상정이다. 어쩌면 생의 계절은 겨울과 여름이 따로 없다. 알토 색소폰이 삶의 전부였던 폴 데스몬드에게도, 러시아가 살아가야 할 이유였던 보리스 쿠스토디예프에게도, 몸을 통해 인간 내면을 파헤치려 했던 에곤 실레에게도 삶은 겨울과 여름의 공존이었다.

삶이 녹록하지 않아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인생은 짧지만 이들의 작품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생의 한 철을 이겨내게 한다. 우리의 조국을 사랑하게 하고 자기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탐구하게 만드는 건 그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거실은 훈훈하고 음악은 여전히 달콤하게 흐르고 있다. 나는 빙그르르 도는 레코드와 함께 뜨겁고 차가운 생의 계절이 내 몸 속을 흐르는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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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