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가 쓰러지는 건 깃털같이 가벼운 마지막 짐 하나 때문이다 - 정호승
저는 낙타를 참 좋아합니다. 낙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때도 낙타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건 제가 시적 은유물로 낙타를 늘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사막에 비유한다면, 그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야말로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낙타!’ 하면 마음속으로 늘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낙타를 처음 본 것은 몇 해 전 명사산으로 유명한 중국 둔황에 갔을 때입니다. 명사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멀리 사막이 모래 능선을 걸어가는 낙타들이 보였습니다. 순간, 숨이 딱 멎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 늦은 오후의 햇살이 능선의 경사진 한 면을 어둡게 만들어 명암의 대비에서 오는 신비감이 극명했습니다.
그날 또 낙타를 처음 타보았습니다. 명사산 입구에서 명사산 바로 아래까지는 걸어가기에는 제법 먼 길이라 다들 낙타를 타고 갔습니다. 낙타 등에 오르자 마치 구름 위에 오른 것처럼 마음이 들떴습니다. 그러나 곧 마음이 아팠습니다. 낙타가 너무나 힘들어했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씩씩거리며 콧김을 내뿜기도 하고 오줌을 싸기도 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관광객을 태우고 걷기 싫어도 걸어야 하는 낙타의 고통이 그곳을 떠날 때까지 내내 느껴졌습니다.
그후 몽골 남고비에 있는 홍그링 엘스에 갔을 때입니다. 해질 무렵, 모래 입자가 마치 설탕가루 같은 모래산의 능선을 맨발로 한참 걸어 올라가다가 문득 산 아래를 뒤돌아보았습니다. 아,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멀리 수십 마리의 낙타들이 낙타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감동적이었습니다. 잠시 넋이 나가는 듯했습니다. 마치 낙타를 그리워하는 나를 위해 낙타들이 일부러 한순간에 나타난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듯 낙타를 바라보았습니다. 낙타가 풀을 뜯다가 한 번씩l 고개를 들고 멀리 사막을 볼 때마다 영원을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소년은 노을이 짙어지자 낙타 등에 탄 채 어디론가 보이지도 않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낙타들도 소년이 뒤에서 모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저는 소년이 낙타들을 데리고 사막 한가운데로 멀어져 한 점 점이 될 때까지, 그 점마저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영원히 서 있을 것처럼 서 있었습니다.
그후, 그때 본 낙타들이 그리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저런 낙타 모형을 사 모았습니다. 원래 무엇이든 수집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나 낙타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기낙타가 엄마 젖을 빨아먹고 있는 모습을 조각한 나무낙타에서부터 자물쇠용으로 만든 철제낙타에 이르기까지 예닐곱 개 정도의 낙타가 모이자 책꽂이 한 칸을 다 비우고 그 안에 그들을 살며시 갖다놓았습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그들을 바라보며 사막을 생각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늘 바라보며 내 인생을 깊게 성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 위를 묵묵히 걸어가는 낙타처럼 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의 일생은 어쩌면 무거운 짐을 지고 먼 사막의 길을 가는 낙타의 일생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낙타가 쓰러지는 건 깃털같이 가벼운 마지막 짐 하나 때문인데...’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지금가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여기까지 걸어왔으면서도 마지막 깃털같이 가벼운 짐 하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건 아닌가 하고 다시 힘을 내곤 합니다.
제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을 때를 돌이켜보면 대부분 깃털처럼 가벼운 짐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왔는가는 살펴보지 않고, 갈 길이 얼마나 남았는가를 살펴보다가 마지막 한순간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깃털같이 가벼운 마지막 짐 하나를 참지 못했다는 것은 그동안 그것을 참지 못할 정도로 있는 힘을 다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깃털같이 가벼운 짐이지만 깃털같이 가벼운 짐이지만 지금까지 참고 견뎌온 무게보다 수천 배 더 무거울 수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더 최선을 요구합니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 무거워 벗어놓고 싶어도 그 짐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벗어놓을 수 없는 짐입니다. 그러나 그 짐은 산을 오를 때 등에 진 배낭의 무게가 몸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처럼 소중합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입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미숙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성숙시킨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누가 쓴 글인지 모르지만, “내 등의 짐”이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내가 짊어진 무거운 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등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어린 낙타를 보고 “어린 낙타”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을 써보았습니다.
사막에서는
흐르는 강물처럼 살지 말고
어딘가에 고여 있는
작은 우물처럼 살아야 한다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겨야
사막을 움직일 수 있다고
사랑하면 더 많은 별이 보인다고
살아가노라면 그래도
착한 끝은 있다고
러시아제 낡은 지프차를 타고
고비사막의 길 없는 길을 달릴 때
먼 지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등에 지고
홀로 걸어가던
어린 낙타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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