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스크랩] 예수에게조차 유대라는 배반자가 있었다

정로즈 2015. 3. 29. 15:42

 

 

예수에게조차 유대라는 배반자가 있었다 - 정호승

  배반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오죽하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말이 다 있을까요. 사람은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을 때가 그 분노를 가장 견디기 힘이 듭니다.
  저라고 어디 배반당한 일이 없었겠어요. 일일이 다 말씀드리기 어려울 따름이지요. 오랜 세월 동안 우정을 쌓아온 친구들한테 당한 배반이야 말을 하면 저만 부끄럽지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한테 당한 배반감은 철저하게 저를 산산조각내버렸지요. 지금 저의 삶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배반당한 일의 연장선상에 있답니다. 오직 바라는 게 있다면 제가 좀더 성숙한 인간이 되어, 제가 배반당한 일에 분노하기보다 제가 배반한 일을 더 기억하고 분노하길 바랄 뿐이지요. 


  그러나 배반의 상처가 쉽게 가라앉지도 잊혀지지도 않습니다. 가라앉았다 싶으면 떠오르고 잊혀졌다 싶으면 어느새 슬며시 악어꼬리 같은 꼬리를 치켜세우고 잿더미가 된 제 가슴을 툭툭 칩니다. 한번씩 툭툭 얻어맞을 때마다 아픔은 마냥 깊어갑니다. 그렇다고 그 꼬리를 냉큼 잘라버릴 수도 없습니다. 자르려고 하면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한동안 나타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제가 다른 사람을 배반하게 되지 않기를 배반의 상처에 몸져누워 간절히 기도할 따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랍니다. 생택쥐페리가 “어린 왕자”에서 그렇게 말하더군요. 우리가 사람의 마음 하나 진정 얻을 수 있다면 배반당할 리가 없겠지요. 마음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는 선현의 말씀이 보통 이야기가 아님을 배반으로 산산조각난 제 마음 조각을 주우며 이제야 쓸쓸히 깨닫습니다. 배반은 어쩌면 부족하고 성실하지 못한 제 사라의 결과이며, 진실하지 못한 제 삶의 결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배반을 당하고 나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납니다. 앙갚음을 하고 싶은 거지요. 인간이라면 당연한 마음입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졸려 대라고 하지만 그게 그렇게 잘되지 않습니다. 앙갚음은 또 다른 앙갚음을 부르게 되고, 결국 복수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가 한번 참아버리면 앙갚음은 또 다른 앙갚음을 부르게 되고, 결국 복수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가 한번 참아버리면 앙갚음의 고리를 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게 그렇게 잘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앙갚음을 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나 앙갚음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고통받는 쪽은 오히려 제 쪽입니다. 더 철저하게 배반당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그러니 앙갚음도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풀 수 없는 인생의 비밀만 하나 더 만나게 될 뿐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예수에게조차 유다라는 배반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큰 위안을 얻습니다. ‘예수한테도 배반자가 있었는데, 하물며 나한테서야...’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배반에서 오는 분노의 강을 건너갑니다. 물론 그 강을 건너가서는 강가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습니다.


  예수는 여러 제자 중에서 특별히 사랑하는 열두 명을 뽑아 사도로 임명하였습니다. 그 열두 제자를 뽑기 위해 예수는 산 위에 올라 먼동이 틀 때까지 밤을 세워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열두 제자는 바로 그런 고뇌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에게는 그 고뇌를 비웃기라도 하듯 가롯 유다라는 배반자가 있었습니다.  어디 유다뿐입니까.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첫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스승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믿었던 제자한테서 예수는 철저하게 배반당한 것입니다.


  예수는 그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예수도 인간이었으므로 끓어오르는 분노의 마음을 삭히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가 주인공인 영화를 많이 본 탓인지 유다를 바라보는 예수의 눈빛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어느 영화에서든 유다를 바라보는 예수의 눈빛은 언제나 연민의 눈빛이었습니다. 분노보다는 요서가 더 짙게 드리워진 사랑의 눈빛이었습니다.


  그 눈빛 때문이었을까요. 유다는 나무에 매달려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예수의 그 용서의 눈빛이 유다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닫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유다가 그런 자살의 방법으로 배반의 대가를 치르길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의 눈빛이 증오와 분노의 눈빛으로 이글거렸다면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를 당연시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삶에서 유다의 배반은 부활만큼이나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만일 유다의 배반이 없었다면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인류는 예수에 대해 다른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유다가 진정 스승을 배반하고 싶었을까. 이미 계획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악역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순종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유다의 배반이야 말로 긍정적인 배반, 이미 예정된 배반일 수도 있다는 생각...
  제가 배반자 유다에 대해 이렇게 헤아려보는 이유는 우리 삶속에도 분명 유다가 존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배반했을 때, 그 사람이 유다의 역할을 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어떤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우리가 유다라는 존재를 어떻게,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 한 번도 배반을 당하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또 배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출처 : 화타 윤경재
글쓴이 : 화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