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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 앙리 마티스, ‘삶의 기쁨’, 1906. 캔버스에 유채, 176.5×240.7㎝. |
■ 서양미술사
조주연의 현대미술 속으로 - ④ 이토록 화사한 부친 살해
앙리 마티스, 시냐크의 분할주의 따르다 색채와 선을 묘사에서 해방시켜
원색의 과격한 충돌 구현한 ‘삶의 기쁨’, 고전주의의 형식·양식·주제에서 완전 탈피1904년은 67년에 이르는 생애 대부분을 인정은커녕 이해조차 받지 못한 채 괴로움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살았던 세잔이 평생 처음으로 빛을 본 해다. 세잔의 작품으로만 이뤄진 전시회가 열렸고, 인상적인 비평이 발표됐으며, 1895년부터 그를 후원했던 유일한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 외에 다른 화상들도 투자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세잔의 명성은 1906년 10월 그가 사망할 무렵까지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파블로 피카소와 더불어 20세기 벽두 유럽 모더니즘의 쌍두마차가 되는 앙리 마티스는 세잔을 “회화의 신”이라고까지 칭했을 정도다. 그러나 마티스가 야수주의라는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발전시키는 데는 세잔뿐만 아니라 쇠라, 반 고흐, 고갱까지 후기 인상주의 4인방 전체가 영향을 미쳤다. 고갱이 사망한 1903년부터 세잔이 사망한 1906년 사이에는 반 고흐(1905), 쇠라(1905), 고갱(1906)의 회고전이 각각 대규모로 개최됐는데, 마티스는 후기 인상주의 전시회를 빼놓지 않고 보러 다니고 구매한 작품을 연구하면서 이 네 미술가가 기틀을 닦은 모더니즘의 기초를 습득했다. 이 중 마티스에게 가장 먼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쇠라의 분할주의다.
쇠라는 1891년 요절했지만, 그가 개발한 분할주의는 시냐크를 통해 후대에 전해졌다. 특히 시냐크가 1898년 잡지 ‘라 르뷔 블랑슈’에 연재한 글 ‘외젠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가 중요했는데, 이 글은 ‘분할주의’ 혹은 ‘신인상주의’로 불리던 쇠라의 방법을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이후 전개된 미술의 ‘새로움’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시냐크가 강조한 것은 들라크루아, 인상주의를 거쳐 신인상주의에서 이뤄진 순색의 해방이었다.
시냐크의 글을 접한 1898년부터 마티스는 분할주의를 따르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1898년은 물론 이듬해에도 마티스의 그림은 여전히 칙칙한 인상주의 화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격정적인 붓질과 두꺼운 임파스토는 그렇다 해도 무엇보다 물감이 캔버스에서 혼합되는 것이 문제였다(가령, ‘코르시카 풍경’, 1898). 분할주의의 절차를 곧이곧대로 따라 해보는 것도 신통치 않았다(가령, ‘누드 습작’, 1899).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마티스는 후기 인상주의 전체를 이해하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됐으며, 빚을 지면서까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구입했다. 곧 마티스는 후기 인상주의 네 대가의 공통점을 파악하게 됐는데, 그것은 이 미술가들이 모두 색채와 선을 묘사의 기능에서 분리시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색채와 선을 묘사로부터 떼어낼 수 있다고 한들, 분리 자체가 능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색과 선을 가지고 무언가를 묘사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그림이 되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마티스가 깨달은 것은 색채와 선을 묘사에서 해방시킨 후 새롭게, 즉 묘사와는 무관하게 재조합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더불어 마티스는 쇠라가 남긴 유산도 분할주의 자체가 아님을 깨달았다. 빛에 대한 시각 경험을 실험실의 과학자처럼 분석하고 자신이 분석한 내용을 물감의 색채를 통해 합성하고자 한 쇠라의 유산에서 마티스가 본 것은 회화의 물질적 요소들을 자율적으로 구사해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순수한 미적 구성으로 회화를 만들어내는 모더니즘의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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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앙리 마티스,‘사치, 고요, 쾌락’, 1904∼1905. 캔버스에 유채, 98.5×118.5㎝. |
마티스는 다시 시작했고, 분할주의와 더불어 다른 후기 인상주의의 기법들도 실험했다. 시냐크의 초대를 받아 간 남프랑스 해변의 생트로페에서 시작했지만 파리로 와서 완성한 ‘사치, 고요, 쾌락’(1904∼1905, 그림 1)은 기본적으로 분할주의를 따른 작품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벌써 분할주의 체계에 반하는 진한 윤곽선이 꿈틀거리며 나타나 있어 마티스가 더 이상 이 체계에 종속된 채 머물고 있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분할주의에서 이탈하는 작업은 1905년 여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마티스가 스페인과의 접경지대에 있는 남프랑스 해안 도시 콜리우르에서 그해 여름에 그린 여러 작품, 예컨대, ‘콜리우르의 집들’ ‘콜리우르의 실내’ ‘열린 창문, 콜리우르’ ‘콜리우르 근처 풍경’ ‘모자를 쓴 여인’ ‘마티스 부인의 초상(녹색 선)’을 보면 분할주의적인 붓질이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색과 보색 대비 구성을 통해 색채로 그림에 긴장감을 준다는 점에서는 분할주의가 유지되고 있으나, 쇠라는 물론 세잔도 사용했던 일률적인 붓질은 자취를 감췄다. 그 대신 눈에 띄게 등장한 새로운 요소들은 누구라도 고갱을 연상시킬 수밖에 없는, 평평하고 비모방적인 색면들과 두꺼운 윤곽선이다(‘콜리우르의 실내’ ‘열린 창문, 콜리우르’ ‘마티스 부인의 초상’). 또한 콜리우르의 그림들에서는 자체의 리듬을 가지고 있으며 두께와 간격에 차이를 두어 표현적인 효과를 빚어내는 선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는데(‘콜리우르 근처 풍경’ ‘콜리우르의 집들’ ‘모자를 쓴 여인’), 이는 반 고흐와 연관되는 요소라 할 것이다. 그러나 마티스가 콜리우르에서 돌아온 후 1905년 가을 살롱 도톤에 출품해서 이른바 야수주의 스캔들을 일으킨 이 작품들에 가장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세잔이다.
회화의 표면은 하나의 장으로서 완결돼야 한다고 생각했던 세잔의 그림에서는 표면 위의 모든 요소가, 심지어는 색칠이 되지 않은 하얀 부분까지도, 회화의 에너지를 증대시키는 구축적 역할을 담당한다.
분할주의에서 탈피하기 위해 마티스가 채택했던 것이 바로 이 생각이다. 이에 따라 마티스의 그림들에서는 어느 경계선에서 출발해 색채 대비의 법칙에 따라 예정된 순서대로 무수한 점을 참을성 있게 채워나가는 분할주의가 사라지고, 표면에 대비되는 색채를 배분함으로써 색들이 표면 전체에서 공명하도록 구축된 화면이 나타났다. 또한 마티스는 색채와 드로잉이라는 전통적인 대립을 제거하고 양자를 통합한 세잔도 받아들였다.
“색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다. 관계를 통해 그리고 오직 관계에 의해서만 드로잉은 실제의 색이 아닌 다른 강렬한 색으로 채색할 수 있다”(세잔). 색채의 관계와 드로잉에 대한 세잔의 사고는 마티스에게서 면의 분할이 그 자체로 색채와 관계가 있다는 발견으로 이어진다. 비례가 조금만 달라져도 변조되는 것이 색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마티스의 원칙이 나왔다. “1㎠의 파란색은 1㎡의 파란색만큼 파랗지 않다.” 이 말은 색채 간의 관계가 표면에 칠해진 양의 관계라는 것, 즉 색채의 질은 곧 양이 결정한다는 뜻이다.
마티스의 독립에 세잔이 미친 영향은 이렇듯 컸으나, 두 사람의 그림은 무척 다르다. 야수주의 작품들에서 선과 색채는 묘사의 기능에서 완전히 분리돼 있다. 예컨대, ‘모자를 쓴 여인’에서 목에 채색된 날카로운 주홍색, 팔레트 모양의 부채, 무지개색 얼굴, 얼룩덜룩한 배경, 무정형의 부케로 해체된 모자, 단축된 신체 표현 등은 화가 앞에 있던 인물을 묘사(고전주의)하는 것도, 그 인물에 부딪는 빛의 효과를 묘사(인상주의)하는 것도, 그런 시각 경험 이면에 있을 법한 근본적인 형태를 묘사(세잔)하는 것도 아니다. 화면 전체에 분포된 보색의 색채 쌍과 상이한 형태의 선들은 작품을 시각적으로 구성하고 활성화하며 팽창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야수주의는 20세기의 모든 혁명 중에서 가장 준비가 잘된 것이었다”는 말이 있는데, 실로 지당하다. 마티스에 관한 한 야수주의는 후기 인상주의의 네 흐름을 종합한 것이었으며, 이는 1898년부터 시작돼 무려 7년이 지난 후 1905년에 완성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만큼이나 중요한 또 한 가지 사실은 야수주의가 채 반년도 지속되지 않은 매우 짧은 혁명에 그쳤다는 것이다. 이는 후기 인상주의의 네 유산을 야수주의로 모두 집약할 수 있게 된 다음 마티스가 거기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05년 가을의 살롱 도톤에서 야수주의로 스캔들을 일으켰던 마티스는 1906년 봄 앙데팡당전에 자신만의 회화적 체계가 틀이 잡혔음을 보여준 작품 한 점을 출품했다. ‘삶의 기쁨’(1906, 그림 2)이라는 유명한 그림이다.
야수주의 시기에 발견한 자신의 색채 원칙을 적용하고 검증한 첫 작품 ‘삶의 기쁨’은 뚜렷한 윤곽선들과 분할되지 않은 색면들이 경쾌하게 난무하는 화면을 보여준다. 이는 마티스를 분할주의의 후계로 삼고 싶어 했던 시냐크에게 경악에 찬 분노를 일으켰으나, 세로 176.5㎝, 가로 240.7㎝에 달하는 이 대작에서 마티스가 품었던 야심은 시냐크의 기대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삶의 기쁨’은 그 달콤한 제목이나 화사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서양 회화의 전통 전체를 상대로 “상상의 부친 살해”(이브알랭 부아)를 감행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마티스의 부친 살해는 그림의 형식, 양식, 주제라는 세 차원에 대한 공격에서 확인된다. 우선 형식 차원의 공격은 조정되지 않은 순색의 색면들을 대규모로 사용해 원색 간의 과격한 충돌을 유발한 것, 진한 색의 두꺼운 윤곽선으로 경쾌한 아라베스크 리듬을 형성한 것, 인체를 수은처럼 녹아내리듯 해부학적으로 왜곡한 것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양식 차원의 공격은 동굴벽화로부터 조르조네 혹은 티치아노, 앵그르 등 서양 미술의 수다한 원천들을 원래의 양식이나 크기와 무관하게 등장시키는 무자비한 도상학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제 차원의 공격은 ‘전원의 합주’에서 유래한 목가풍 장르화의 바탕인 성차의 교란에서 나타난다.
‘삶의 기쁨’의 주제는 화면 중앙에서 님프들이 뛰놀고 다른 인물들은 목가적으로 노니는 이상향의 행복처럼 보인다. 그러나 목가풍 장르화라면 성차를 확실히 한 위에 육체의 아름다움-시각적 쾌락-욕망의 기원을 직접 연관시켜야 하는데, 이 그림은 인체를 사디즘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성차의 교란과 인체에 대한 사디즘적 공격을 나타내는 단서는 한두 군데가 아니다. 화면 오른쪽의 피리 부는 목동은 ‘삶의 기쁨’에서 유일한 남성 형상이지만 당초에는 여성 누드로 구상됐다. 쌍나팔을 불고 있는 전경 중앙의 누드는 습작에서 분명한 여성이었는데, 완성작에서는 성징이 불분명해졌다. 목동과 그 맞은편 화면 왼쪽에 서 있는 누드를 제외하면 모든 인체는 해부학적으로 매우 부정확하게 표현돼 있다. 마지막으로 키스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경 오른쪽의 두 인체는 머리가 하나로 합쳐져 있어, 인체에 대한 사디즘적 공격의 정점을 이룬다(마거릿 워스).
이 상징적 부친 살해를 통해 마티스는 서양 회화에서 고전주의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화면 정중앙의 군무는 모더니즘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음을, 즉 에콜 데 보자르에 의해 현대에도 명맥을 유지하던 아카데미 규범의 권위를 완전히 떨쳐낸 해방의 춤인 것 같다(이브알랭 부아). 그러나 이 자유는 단순한 해방이 아니었다. 서양 미술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재현의 전통을 근절했으니, 이제 모더니즘은 끊임없는 미학적 혁신을 통해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미술이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