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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발코니

정로즈 2020. 3. 31. 09:42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팀 기자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팀 기자

맑은 하늘, 밝은 옷에 밝은 표정의 사람들…. 보기만 해도 염려가 사라질 것 같은 이 그림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게티미술관의 천장화(사진)입니다. 그림 속 개도, 앵무새도, 발코니 위에서 관객을 내려다봅니다. 온갖 명화로 가득한 이 미술관에서 어지간해선 고개 들어 천장까지 집중해 보게 되진 않을 텐데, 그렇게 이 그림을 발견한 관객들은 발코니의 축제로 초대받은 듯 기뻤을 것 같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헤리트 반 혼토르스트(1590∼1656)가 위트레흐트 자기 집 천장에 그린 이 그림은 3m 좀 넘는 크기인데, 잘린 난간의 모양으로 봐선 원래 두 배는 더 컸을 겁니다. 악사들과 음악회는 ‘조화로운 사회’라는 이상을 은유한다고 해 당시 화가들이 즐겨 그린 장면입니다. ‘발코니의 악사들’은 화가가 세상을 떠난 뒤 암스테르담으로
런던으로 옮겨가며 계속 사랑받았습니다. 1970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미국의 석유 재벌 게티가 구입한 것이 오늘에 이릅니다.
 
화가의 아들로 위트레흐트에서 그림을 배우던 혼토르스트는 스무 살 즈음 이탈리아 로마로 갔습니다. 이후 고향에 돌아와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탈리아의 추억이 담겼을까요. 혼토르스트는 헤이그·런던·코펜하겐에서 궁정 화가로 활동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자기 집 천장에 그린 이 그림만큼이나 경계 없이 돌아다닌 셈인데, 코로나 시대가 되어버린 요즘은 400년 전의 자유로운 이동마저 새삼스럽습니다.
 
헤리트 반 혼토르스트, 발코니의 악사들, 1622, 패널에 유채, 309.9x216.4㎝ [게티미술관 소장]

헤리트 반 혼토르스트, 발코니의 악사들, 1622, 패널에 유채, 309.9x216.4㎝ [게티미술관 소장]

‘발코니의 악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자주 보이는 요즘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자가격리 중인 시민들이 발코니에서 노래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듯 런던에서도, 파리에서도 사람들이 발코니에 나와 프라이팬을 두드리거나 손뼉을 치며 의료진에게 감사를 표시합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운하를 떠다니는 보트 위에서 작은 공연이 열려 발코니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또 평소 같으면 성 베드로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들을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며 축복했을 교황은 최근 비까지 내리는 텅 빈 광장에 홀로 섰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같은 배를 타고 있으며, 연약하고 길 잃은 사람들”이라고, “우리를 돌풍의 회오리 속에 내버려 두지 말아달라”고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이 외로운 기도 장면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며 광장에 모였을 군중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보고 공감했습니다.
 
게티미술관의 이 천장화도 지금은 볼 수 없습니다. 미국의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미술관도 폐쇄돼 언제 다시 그 아래 설 수 있을지 아직 모릅니다. 대신 명화들 틈에서 주목받지 못했을 이 그림은 온라인으로 재발견되고 있습니다. 잃고 나니 소중해진 우리네 일상처럼 말이죠. 국경이 더욱 높아만 가는 지금,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어도 저마다의 발코니가 하나로 연결되는 역설적 체험이 이어집니다.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