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1.01 21:49
강물은 덧없이 흘러가기만 해도 바다가 쉼 없이 새로 시작하듯
이시간은 늘 새 물결을 몰고 온다
뱀은 재생·치유·영생의 상징… '스며라! 배암' 같은 열정으로 꽃뱀의 무늬처럼 화사한 새해를
박해현 논설위원

뱀띠 해 새해 아침이 오면서 지난해는 벌써 벗어버린 시간의 허물이 됐다. 삶은 늘 시간의 허물을 벗어 새로운 시간의 물결을 알몸으로 맞는다. 지난 시간의 허물이 벗겨질 때, 허물에 켜켜이 쌓인 절망·원망·후회·자책·한숨도 쓸려나가야 한다. 뱀이 허물을 벗듯, 아쉬움도 함께 벗어야 한다. 허물이 알몸에 문신으로 남으면 알몸은 허물의 감옥에 갇힌다.
다행히 새해 초 아침 햇살은 지난 세월의 허물을 삶의 거죽에서 솜씨 좋게 뜯어내 버리는 듯하다. 인간의 육체가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평소 둔감하던 인간의 영혼은 시침(時針)의 날카로움에 흠칫 놀라 새로운 삶의 자극을 느끼기 마련이다.
강물을 가리켜 "흐르는 것이 저와 같도다"라고 한 공자님 말씀처럼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강물에 비유해왔다. 사람들은 흔히 나이를 먹으면 왜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어느 심리학자는 이 질문에 대해 인생을 강변(江邊) 따라 달리기에 비유하는 답을 내놓았다. 철없고 한창 팔팔한 나이엔 누구나 천천히 흐르는 강물보다 더 빨리 달리며 깔깔거린다. 하지만 숱한 세월의 이슬에 젖어 머리가 하얘지면 강물보다 더 빨리 뛰기 힘드니,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강물이 덧없는 세월의 진행을 보여준다면, 바다는 한없는 세월의 순환을 상징해왔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강물 따라 흘러간 생명의 무덤이지만, 수평선에서 물결을 밀어 다시 뭍으로 달려오는 재생(再生)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인 문정희는 바다 앞에서 깨달은 시간의 순환을 기리는 시 '바다 학교'를 썼다. '바다는 손도 없이/ 나를 씻기고/ 바다는 발도 없이/ 발자국 소리를 낸다// 쉴 새 없이 떠나가며/ 쉴 새 없이 제자리에서// 천년을 만년을 새로 태어난다'. 바다는 그렇게 쉼 없이 새로 출렁거리면서 우리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뱀처럼 꾸불꾸불하게 길게 이어진 길은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뱀이 개구리를 쫓는 형상'이라고 한다. 그런 땅은 먹이를 삼킨 뱀의 기운 덕분에 농작물을 잘 자라게 한다. 독사(毒蛇) 때문에 뱀은 악(惡)의 상징으로 통용되지만, 뱀은 겨울에 사라졌다가 봄이면 다시 나타나기에 재생과 치유, 영생(永生)의 상징이기도 하다.
새 정부가 출범하고 나라가 새로워진다고 하지만 경제 불황의 끝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팍팍한 살림살이 탓에 새해가 와도 가슴은 답답하다. 뱀띠 해를 맞아 시인 서정주가 젊은 시절에 "스며라! 배암"이라고 했던 화사(花蛇)의 몸부림이 떠오른다. 꽃뱀의 원시적 생명력이 우리 사회에 넘쳐나길 바란다.
실제로 뱀이 일으키는 충격과 전율은 때때로 삶의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시인 김명인은 산을 오르다 뱀을 만나 소스라치게 놀란 체험 덕분에 '꽃뱀'이란 아름다운 시를 빚어냈다. 시인은 벼랑을 등지고 절벽을 오르다 돌 틈새에서 갑자기 나타난 꽃뱀에 크게 놀랐다. 떨린 가슴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과연 자신이 본 것이 꽃뱀이었는지, 아니면 꽃무늬였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꽃뱀의 시간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제 사족(蛇足)을 지워버렸다'고 했다. 꽃뱀은 꽃의 이미지만 남기고 사라졌다. 꽃뱀은 가뭇없이 사라졌고, 시간의 허물이 시인의 기억을 뿌옇게 덮지만, 꽃무늬의 추억은 하늘의 별자리처럼 아득하다. 별은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 가슴속에서 아름답게 빛난다.
김명인 시인은 꽃뱀을 본 덕분에 삶을 예술의 관점에서 성찰하는 순간을 맞았다. 꽃뱀은 시인의 내면에 충격을 줘 일상을 사는 속도에 변화를 일으켰다. 우리는 시간의 강물을 따라 허겁지겁 뛰다가 때때로 걸음을 멈추기도 한다. 옛날 켈트족의 어느 서사 시인은 이런 상황을 두고 '세월을 살던 내가 순간을 산다'고 노래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의 접점에 서게 된다.
새해 아침이 그런 순간을 가장 강하게 불러온다.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시간은 돌고 돌아 다시 새해 아침을 연다. 올해 내내 돌아갈 시곗바늘에게 부탁한다. 화려한 꽃뱀의 무늬를 내 삶에 새기되, 제발 흉측한 사족(蛇足) 따위는 끄적거리지 말아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