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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럽고 무식하다? 우리말만큼 섬세한 언어 없죠

정로즈 2014. 8. 18. 18:20

촌스럽고 무식하다? 우리말만큼 섬세한 언어 없죠

    -순우리말 시인 김두환씨
    36년 약사 생활 접고 시 쓰기 몰두… 1500편 넘는 詩… 열 번째 작품집 내
    "'외래어 써야 지식인' 정서 바꾸고 학교교육부터 우리말 관심 가져야"
"'짐벙지다'는 낱말을 아세요? '색깔이 보기에 멋들어지고 넉넉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정겹고 입에 감기는 우리말인데도 아는 이가 없어 쓰이질 않아요. 보통 '화사(華奢)하다'는 한자어를 대신 쓰죠. 이렇게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도 굳이 한자어를 빌려 쓰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김두환(78)씨는 '순우리말 시인'이다. '하늘 길 새벽달 보인다/ 새살떨거나(차분하지 못하고 가벼워 수선 부리다) 덤벙거리지 말고 준비하란다…'(시 '어디쯤 가고 있는가'), '꽃나이(여성의 젊은 나이) 누나와 또래들 모처럼/ 눈빛 맞춰 몽그작대고(몸이나 신체 일부를 느리게 비비다) 있네…'(시 '산수유꽃')처럼 순수 우리말로만 시구(詩句)를 짓는다. 김씨는 최근 시집 '어디쯤 가고 있는가'(고요아침 펴냄)를 냈다. 그의 열 번째 작품집이다. 1987년 등단 이래 순우리말로만 시를 1500편 넘게 썼다.

김두환씨는“우리말로 시를 쓰다 보니 주변에서‘우리말 겨루기 대회’에 도전해보라는데, 나이가 드니 순발력이 떨어져 그럴 자신은 없다”고 했다. /이경원 인턴기자(중부대 사진영상학과 3년)
김 시인은 '겨레의 넋을 지키고자' 토종어로 시를 쓴다고 했다. "당장엔 우리말이 낯설고 들온말(외래어)이 편할 수 있죠. 하지만 말이 먹히면 정신이 먹히고, 정신이 먹힌 민족은 바로설 수 없습니다. 결국은 강대국에 흡수당하는 문화 노예가 되는 거죠."

김 시인은 외국어나 외래어를 써야 '지식인'으로 봐주는 사회 풍조가 문제라고 했다. "대통령이나 장관 같은 지도층부터 순우리말을 거의 쓰지 않아요. 되레 영어나 한자어를 섞어 쓰려고 애쓰는 듯해요. 그들도 잘못이지만, 그래야 유식한 사람으로 보는 해묵은 국민 정서도 문제죠. 높은 분들이 '개간(開墾)' 대신 '무텅이'라 말하고, '담합(談合)' 대신 '짬짜미'라 하면 당장 '촌스럽다, 무식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우리말이 그런 취급을 받고 있어요."

그는 교육 문제도 지적했다. "학교부터 우리말에 무관심하니 청소년들이 순우리말에서 멀어지죠. 늘 쓰는 말인데도 우리말인지 남의 말에서 유래한 것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가방(かばん·가방), 냄비(なべ·나베), 수염(鬚髥), 고무(gomme), 시소(seesaw) 같은 단어가 그런 예지요. 이런 걸 가르치는 선생님이 얼마나 있을까요?"

김 시인은 성균관대 약대를 졸업하고 36년간 약사로 활동하다가 일을 접고 2000년 본격적으로 우리말 시인으로 나섰다. "보잘것없는 글재주지만 순우리말을 지키는 데 보탬이 되고 싶었어요. 제 작품이 널리 읽히는 건 물론 아니죠. 하지만 시집으로 출간됐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수백, 수천년을 견디는 지식 창고예요. 조선시대 책을 통해 중세 한글이 후대까지 전해졌듯이 제 책도 먼 훗날까지 비바람을 견뎌준다면 후손에게 토종어를 알리는 귀한 도구로 쓰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말만큼 섬세하고 풍부한 언어도 드물어요. 알래스카 이누이트족이 표현했던 눈(雪) 종류가 20개나 된다는 건 잘못 알려진 것이래요. 그런데 우리 한민족의 '눈'에 관한 단어는 함박눈, 싸라기눈, 진눈깨비, 가루눈, 자국눈, 소나기눈, 도둑눈 등 못해도 10개가 넘어요. 알래스카에 비하면 눈이 드문 환경인데도 말이죠. 그런 점만으로도 우리말은 가치 있는 인류 자산이죠. 우리가 애정을 더 쏟아 정성스럽게 가꿔가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