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아, 좋다... 평화라는 게 이런 건가” 88세 독거 화가 황규백

정로즈 2019. 3. 16. 09:03
입력 2019.03.16 07:00 | 수정 2019.03.16 08:14

"60년간 슬럼프 없어…" 외로워서 행복한 거장 황규백
"좋은 그림은 팔려, 나쁜 건 안 팔려. 만고의 진리"
"행복한 인생 살려면 나만의 센스 있어야"
메조틴트로, 20세기 미국 화단 평정한 독보적 판화가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다, 70살에 귀국해 회화로 전업

그가 30년간 미국 판화작가로 살면서 남긴 메조틴트의 족적은 한국 미술계의 자랑이다. 70살에 영구 귀국해 회화 작가로의 모험에 성공한 황규백. /사진=이태경

얼마 전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렸던 황규백의 전시회는 대성황을 이뤘다. 노화가가 그린 고적한 풍경 앞에서 사람들은 마음을 뺏긴 채 오래 서성였다. 우산, 식탁, 시계, 모자… 몇 개의 사물을 화면에 단순하게 배치했을 뿐인데, 그 여운에 뒷머리가 아득해졌다.

우산과 빈집, 바위와 백조, 꽃과 나비가 제 각자의 위도와 경도에서 미묘한 멜랑콜리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과묵한 음악이었고 화려한 수묵이었고, 충만한 고독이자 외로운 귀향이었다.
이 낯설고도 익숙한 평온의 정체가 궁금했다.

20세기 메조틴트 판화의 대가이자 이제는 회화 작가로 돌아온 88살의 거장 황규백을 만났다.

뉴욕에서 30년간 활동하다 2000년 영구 귀국한 이후, 그는 서울 방배동에 자기만의 유적지를 세웠다. 파리의 다락방과 로마의 유적지, 뉴욕의 로프트와 유럽의 고성이 뒤섞인 아틀리에는 온통 그가 그린 벽화로 채색되어 있었다. 집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었다. 방문을 열 때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꿈결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멋진 곳에 사십니다.

"이 집에 머무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천장을 3m 높이고 사다리를 타고 하늘과 구름을 그려 넣었어요. 벽난로 위의 거울도 내 손으로 만들고 벽에는 기둥과 아치형 문을 그렸어요. 다락방도 만들고 천장을 통로로 이었죠.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니 놀랄 만큼 건강해졌어요. 나는 이 집에서 잘 나가지 않아요. 이곳이 내 낙원이죠(웃음)."

-탤런트 최불암 선생을 닮으셨어요.

"(파~하고 터지듯 웃으며)내가 그 분 헤어스타일을 좋아해. 헝클어진 듯 잘 다듬어졌더구만."

미술관을 방불케하는 황규백의 아틀리에. 그만의 낙원에서 매일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그림을 그린다./사진=황정욱

-선생의 헤어 컬러도 부드러운 먹색이군요.

"사실은 블루예요. 검은색으로 염색하면 금새 형광등 켠 것처럼 이마 끝이 허얘져. 블루는 부드럽게 먹색으로 변해가요. 검은 머리도 흰 머리도 다 같이 어울리죠."

검은 바탕이 일반적이었던 구미 유럽의 메조틴트 판화 기법을 자기만의 맑은 회색으로 바꿔 판화계에 서정적인 혁신을 일으킨 황규백. 자신이 사는 집 그리고 자신의 몸까지 색이 물드는 캔버스로 보는 게 신기했다.

-뉴욕에서 판화가로 명성의 정점을 찍었던 분이 70살이 다 되어 회화로 장르를 바꿔 귀국하셨어요. 남들은 은퇴할 나이에 그런 모험을 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나는 뭐든 결정을 내리면 단번에 해요. 뉴욕 소호에 있는 아틀리에를 74년에 구입해서 살았는데 2000년에 팔고 한달만에 서울로 왔어요."

-회화에서 판화로 갈 수는 있지만, 판화를 하다 회화를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어요. 몸의 문법이 판이하니까요.

"미국과 유럽은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판화의 전성시대였어요. 90년대 중반이 되니 30년간 이어지던 판화의 열기가 시들해지더구만. 미술 시장이 페인팅의 오리지낼러티를 높이 사면서 판화의 열기가 식었어요.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판화는 복수로 나오니 값이 싸거든.

나는, 언젠가 때가 오면 회화를 하겠다는 그런 마음이 항상 있었어요. 판화는 오브제도 테크닉도 제한적이라 회화로 옮기는 게 쉽지는 않았죠. 준비를 단단히 했어요. 3개월 이탈리아 말을 공부해서 이탈리아에 갔어요. 전국을 돌며 프레스코화를 봤지. 물감을 어떻게 쓸지 감이 오더군요."

첼로를 배워 연주하는 꿈을 꾸는 노화백. 죽을 때 솔베이지의 노래를 듣고싶다고 했다./사진=이태경

-몸이 캔버스 앞에서 제대로 반응을 하던가요?

"그럼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판화는 노동집약적인 작업이에요. 메조틴트 판화 작은 걸 하나 하려고 해도 송곳 바늘로 한 달을 작업해요. 체력이 힘에 부치지. 오히려 나이가 들어 붓으로 그리니 더 크고 자유롭고 빠르게 작업할 수 있어요."

-혼자 그리시나요? 도와주는 조수는 없습니까?

"조수는 없어요. 나는 그림도 빨라요. 판화할 때는 1년에 10점을 했는데, 회화는 하나 잡으면 일주일 안에 끝내요. 오래 붙들고 있지 않아요. 그려야 할 그림은 이미 머릿속에 딱 들어있어. 드로잉도 없이 단번에 그려요."

30년 넘게 매일 동판을 깎고 찍으면서 정밀하게 수련된 그의 손은,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광부가 금맥에 당도한 듯, 마음의 정경이 빈 캔버스 위에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결정과 행동이 정말 빠르시군요.

"몰라요. 내 운명이 기질이 그런가봐. 36살에 파리에 가서 50년간 나는 행운만 누린 것 같아요."

황규백은 193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용산교통고등학교에서 홀로 기숙하며 처음 그림을 접했다. 학교에서 밥먹여 주고 재워주니 좋은 시절이었다고 했다. 재학 중에 6.25 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그 길로 자원입대했다.

4년 동안 최전선에서 온갖 끔찍한 참상을 다 보았다. 제대해서 서울로 온 그를 맞은 건 (군미필자로 오인해)다시 군대에 실어보내려던 광화문 앞의 징집 트럭이었다. 전후 한국은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횡행했다. 불행의 도돌이표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태어나 나쁜 세상만 맛보니 기가 꺾이더라,고 그가 아득한 눈빛으로 젊은 날을 더듬었다.

1954년 국전에 입선했지만, 출구없는 불안정한 날들이었다. 누군가 파리에 가보라고 했다. 그 길로 알리앙스 프랑세즈를 다니며 2년간 말을 배우고, 500달러 뱃삯이 마련되자 미련 없이 요코하마 MN라인에 몸을 실었다. 대책 없는 탈출이었다

조수도 제자도 없이 항상 빈 캔버스에 홀로 앉는다./사진=황정욱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떠나기 한 달 전에 말씀드렸어요. 어머니는 두말없이 "가라"고 하셨어요. 이곳에선 배추장사 말고는 할 게 없어 보였거든. 기다리는 사람도 없으니 느긋하게 홍콩, 싱가폴, 봄베이, 아프리카를 돌아 한 달 반 만에 마르세유 항구에 정박했어요. 그렇게 망망대해를 떠돌다 육지에 닿으니 프랑스가 내 나라인 듯 어찌나 반갑던지요(웃음). 낯설지가 않더라고."

기차 타고 새벽에 파리에 내리니 또 온 도시에 바게트 빵 냄새가 진동하더라고. "공기가 달았지. 내겐 신천지였어요. 마침 배 안에서 사귄 일본인 친구가 몽마르트르에 가면 자기가 아는 화가가 있으니 한번 찾아가 보라더군요. 물어물어 만났더니 요즘엔 또 판화가 유행이래요." 그렇게 또 몽마르트르 화가의 우연한 소개로 유명한 판화 공방 ‘아틀리에17’을 찾아가 일을 시작했다.

1968년, 파리의 판화 공방 ‘아틀리에17’은 각국의 작가들이 모인 예술의 낙원이었다. 피카소, 미로, 샤갈, 칸딘스키 등 유럽의 망명 작가는 물론 폴록, 로스코 등이 ‘17 공방’에서 판화를 제작했다. 미국의 화상들은 넘치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파리의 판화 공방으로 몰려왔다. 넥타이를 매고 연장을 쥔 젊은 예술 노동자 황규백은 죽기 살기로 신나게 판화에 매달렸다.

2년 뒤, 황규백은 미국 거물 화상 휴 매케이의 스카웃으로 뉴욕행을 결심한다. 7천불이라는 ‘거금'도 손에 쥐었다. 1970년대 초 뉴욕 화단은 팝아트의 성장과 판화의 열기가 오버랩되던 시기. 뉴욕땅을 밟은 날은 7월 4일, 미국독립기념일이었다. 백남준, 김환기 등이 이미 뉴욕에서 활동 중이었다.

-파리에서 뉴욕으로 다시 점프하신 걸 보면 기회를 감지하고 행동하는 실천가 기질이 있었던가 봅니다.

"떠날 때라는 걸 알았던 거죠. 입던 옷도 다 버리고 물감 보따리만 달랑 싸들고 뉴욕으로 왔어요. 처음 가보니 뉴욕은 히피들이 많아 정신 사납더라고(웃음). 시간이 지날수록 뉴욕은 파리와는 또 많이 달라요. 새로운 것, 좋은 작품 못만들면 바로 아웃이지. 어느날 잔디 위에 누워 신세한탄을 하는데 눈 앞에 손수건 한 장이 아른거려요. 하늘, 잔디, 손수건… 그 아른아른한 이미지를 잡아서 작품을 했는데, 그게 나한테 날개를 달아줬어요."
▲그의 초기작 ‘잔디밭 위의 하얀 손수건'.
영국과 핀란드 판화비엔날레를 비롯해 각종 국제 비엔날레에서 상을 받고 뉴욕 현대미술관, 대영박물관, 파리 시립미술관에서 황규백의 작품을 소장하면서, 그의 이름은 날로 높아갔다. 1년에 10점을 제작하면 반은 미국으로 반은 유럽으로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금속활자와 목판 인쇄의 후예로 한국인 황규백은 그렇게 메조틴트 판화의 세계를 평정해 갔다.

-1984년 사라예보 동계 올림픽 포스터를 봤어요. 작은 녹색 칠판에, 몽당연필과 시계가 돋보이더군요. 우아하고 파격적인 비주얼에 자긍심이 느껴졌습니다.

"녹색 칠판 아래 토끼와 거북이도 있어요. 당시에 개막식이 임박해서 올림픽 위원회에서 의뢰가 왔었어요. 스피드를 제일로 치는 올림픽이지만, 나는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더했죠. 데이비드 호크니 등 쟁쟁한 작가들 작품을 제치고 내 포스터 엽서가 가장 잘 팔렸대요(웃음). 가만 보면 나도 머리가 나쁘진 않은가 봐. 허허."

-구미 유럽의 미술관과 컬렉터들은 선생 작품에 왜 그렇게 열광했나요?

"그때까지 메조틴트 판화는 흑백에 검정 바탕으로 제작이 됐어요. 그런데 나는 검정에 투명한 잉크를 넣어 배경을 회색으로 만들었죠. 판화인데 연필로 그린 듯 창호지처럼 고운 텍스처가 나왔어요. 맑고 밝고 시적인 느낌이 좋았던가 봐. 그때부터 국제무대에서 회색 쓰는 K.B. Hwang이라는 브랜드가 생긴 거죠."

-작지만 혁명적인 변화였군요!

"내가 깨우친 건, 어디서나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가 있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풀밭 위의 손수건도 마찬가지야. 그때 손수건이 안 팔렸으면 나는 비렁뱅이가 됐을 거예요. 그 생각은 종이 한 장 차이였죠. 하지만 남이 하지 않은 걸 한 거야. 못하면 죽는다고 생각했거든(웃음)."
▲사라예보 동계 올림픽 포스터로 유명한 황규백의 메조틴트 판화.
-단순히 잘 그린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겠지요?

"잘 그리는 건 쉬운 거예요. 내가 주로 그리는 우산, 벽, 식탁… 이런 걸 누가 못 그려요? 쉬운 거예요. 손수건은 초등학생도 쓱쓱 그리지. 어디에 놓고 그리느냐가 오리지낼러티예요. 그게 자기 세계, 나만의 센스죠."

-그런 센스는 타고나는 건가요?

"어느정도는요. 단순히 예술만의 얘기는 아니예요. 센스가 있으면 가난해도 부유하게 살아. 센스 있는 사람은 비싼 옷으로 번드르르하게 치장 안해. 슬쩍 걸쳐 입어도 멋이 나거든. 적게 먹어도 좋은 걸 찾아 먹지. 내 대표작인 손수건도 공부를 하면 더 잘 그릴 수 있어요. 하지만 더 잘 그리면 못 그리게 돼. 서툴게 그려야 멋이죠. 그걸 감지하는 게 센스야. 감각이죠."

-아름다움을 향한 그 감각의 문은, 대관절 언제 어떻게 열립니까?

"온 마음으로 감탄하고 감사할 때죠. 좋은 음식 먹으면 "와! 너무 좋다" 그러잖아. 인간이 만든 건데도 신의 선물같거든. 친구랑 바다 앞에 서면 "와! 너무 좋지?" 그 한마디면 된 거야. 인생이 얼마나 좋은지, 사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무슨 어려운 설명이 더 필요해요(웃음)."

문학적 철학적 설명은 다 쓰잘데기 없다고 했다. 문득 일본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자이 오사무가 어릴 적 헤어진 유모를 만났던 일화를 기록한 ‘쓰가루'는 황규백에게 특별한 흔적을 남겼던 모양이다.

-정취와 도취가 절정에 이르면 사실 말이 필요 없지요. 오사무가 그러더군요. ‘사랑'이라고 쓰고 나니 더는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고.

"할 말이 없는 거예요. 다자이 오사무는 5살 때까지 유모가 엄마인 줄 알고 컸어요. 서른 몇 살에 기차와 버스를 타고 유모를 찾아 쓰가루 지방으로 가요. 30년 만에 학교 운동장에서 유모를 만나 털썩 주저앉아요. "슈 짱!" 그리고는 말을 못 해. 너무 반가우면 말을 잊어요. 나는 그 대목이 너무 좋아. ‘아! 평화라는 게 이런 건가.’ 오사무는 이 몇 줄을 위해 몇백장의 원고지를 버렸을 거야. 그게 유명해져 쓰가루엔 유모와 아이의 동상이 생겼어요. 동감, 좋은 느낌, 살면서 그걸 느낄 수 있으면 충분해요."

판화에서 회화로 이어진 황규백의 고요한 그림들.

소통과 공감의 시대에 말이 필요 없는 동감을 역설하는 황규백. 전자가 인문학의 일이라면 후자는 예술의 일이었다.

-선생의 예술도 세상 곳곳에 있는 ‘아! 좋다'...를 발견하는 일이겠지요?

"그렇죠. 아름다움은 곳곳에 있어요. 어느 집 담벼락에 핀 야생화도 태평양의 성난 파도도 수력발전소의 탱크도 나에게는 곱디고운 시로 읽혀요."

-휘트먼의 시 ‘풀잎'을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땐 하이쿠를 좋아했어요(웃음). 학창 시절엔 ‘여름 산, 비뚤어진, 작은 오솔길인가' 그런 하이쿠도 끄적였지요. 풀잎은, 그냥 좋아요. 짓밟아도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니 그 생명력이 참 좋아. 게다가 잔디 위엔 뭘 올려놔도 어울리잖아. 찻잔도 연필도 바이얼린도… 그 품이 엄마 가슴처럼 부드럽죠."

-풀잎의 위력일까요(웃음). 추상표현주의가 강세인데 선생의 소박한 환상주의는 변함없이 사랑을 받고 있어요.

"분위기가 있잖아요(웃음). 나는 몇 가지 오브제 만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요. 나만의 독특한 기술이죠. 허허."

그가 일생동안 제작한 판화 작품의 수는 총 2만 4,000여점(240점의 작품X에디션 평균 100장)에 이른다. 이 작품은 모두 외국 판화전문 갤러리스트에 의해 전 세계에 판매됐다.

-결이 비슷한 화가로 누구를 꼽으세요? 박수근이 그린 마그리트 같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만.

"마그리트를 좋아해요. 나는 좀더 상식적이고 마그리트는 상식을 넘어서죠. 나는 당치않은 건 또 못하거든. 이태리 화가로는 키리코를 좋아해요. 그이가 그림 속에 조각 동상을 잘 넣는데, 어둡고 적요한 가운데 동상이 들어가서 멋이 나요."

-키리코의 그림엔 서스펜스가 있죠. 선생의 그림은 좀더 조용하고요.

"모딜리아니도 뭉크도 참 좋아해요. 그런데 키리코의 동상 오브제는 정말 욕심이 났어요(웃음). 혹 내가 영향을 받을까봐 키리코 근처에 갔다가도 아주 멀리 도망을 갔지. 따라하면 안되니까. 허허. "

-한때 한국 미술계는 조영남 대작이나 대작가들의 위작 사건으로 시끄러웠습니다. 선생에겐 너무나 먼 이야기지요?

"(한참을 침묵하다가)그 이야기는 안할래요. 다만 나는 내 그림에 항상 정직했어요. 나는 한 작품 그리는 데 일주일 걸려요. 하지만 그렇게 그리기 위해 88년이 걸렸어요."

-담벼락의 벽돌 하나도 같은 게 없더군요. 치밀한 손작업이 사람을 엄숙하게 만든다는 말씀도 기억납니다. 대표적인 장인 형 아티스트인 선생은 요즘의 팝아티스트 경향을 어떻게 봅니까?

"한 미술평론가가 뉴욕타임스에 비판적인 글을 썼어요. ‘요즘엔 예술 아닌 게 없이 다 예술이다'라고. 팝아트는 지나가는 흐름이에요. 페인팅은 좀 달라요. 누가 허물어뜨릴 수가 없어요. 그 외엔 다 한 시절 지나가는 바람 같아. 판화도 그랬죠. 제프 쿤스 같은 사람도 한때 그런 일이 있었다, 라고 기억되겠지."

가격이 비싸다고 다 좋은 그림은 아니라고 했다. 천정부지로 값이 치솟는 단색화 열풍에 대해서도 ‘감동이 있어서 비싼 건지, 비싸서 감동이 있는 건지' 분별해야 한다고 조용히 일갈했다.

-선생도 일평생 컬렉터와 유명 미술관의 사랑을 받으며 ‘팔리는 작가'로 살아오셨지요. 뉴욕 초기 시절엔 백남준 선생도, 김환기 선생도 부러워했다고 들었습니다.

"잘 팔리는 건 달라요. 좋은 그림은 팔려요. 만고의 진리예요. 나쁜 건 안 팔려. 간단해요. 내 그림은 감정을 전달하니 좋고, 게다가 예쁘잖아(웃음). 그림 팔아서 생활할 수 있다는 건 감사하고 신통한 일이죠. 하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안 팔릴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 매일매일 열심히 하는 거죠. 한번 팔렸다고 끝이 아니야. 나는 내 작품을 산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잘 살고 싶어요. 나중에 공연히 샀다, 그런 생각 들면 비극이잖아. 허허."

“재밌어요. 행복해요. 기뻐요"를 입에 달고 사는 88세 젊은 노인./사진=황정욱

-서울 생활은 만족하세요?

"뉴욕은 경쟁의 도시예요. 늘 새로운 걸 원해요. 기회는 많지만 버리는 데도 익숙한 도시죠. 젊을땐 좋지만 나이들면 피곤해. 갖은 인종에 정서적 압박도 심해서 언젠가부터 고국으로 가고 싶었어요. 지금은 너무 재미있고 행복해요(웃음)."

-이젠 어떤 사건도 뒤흔들지 못할 평화가 선생의 그림 안에 당도해 있더군요. 분노와 격정의 감정은 다 어디에 두셨나요(웃음)?

"나는 사물을 보면 주로 옛날 생각을 많이 해요. 오브제를 어떻게 배치할까 생각하면, 마음에 분노와 격정보다 그리움과 외로움이 앞서요. 외로움을 좋아하죠. 눈물도 많고. 일례로 2002년 월드컵 때 광화문 광장에 모인 청년들을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조국이 그리웠던가봐. 평생 한국 청년들을 못보고 살았거든. 내 자식은 아니지만 얼마나 떳떳해 뵈던지, 그제서야 편안히 눈감을 수 있겠더라고요. 도보다리에서 남북한 정상이 만나는 거 보고도 또 많이 울었어요."

6.25 전쟁에 참전하고 돌아와 광화문에서 다시 군대로 끌려갔다던 그의 과거사가 플래시백으로 떠올라, 잠시 아득해졌다. 이제 나빴던 기억, 억울했던 일은 모두 좋은 기억, 아름다운 날들로 덮인듯 했다.

-자녀는 없으신가요?

"없어요. 하지만 처자가 있어도 외로운 법이지요."

-제자는 없으신가요?

"없어요. 없어도 행복합니다. 외로워서 행복하지요."

-슬럼프는 없었습니까?

"전혀 없었어요. 이렇게 부지런히 일하는데 어떻게 슬럼프가 와요? 매일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작품만 생각해요. 60년간 빠짐없이 정시 출근, 정시 퇴근했어요. 밤에 누울 땐 "혹시 이러다 내일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죠(웃음). 그런데 그렇게 힘들어도 재밌어요. 재밌으니 수전증까지 이겨냈지."

놀이에 빠진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노동으로 단련된 수도자 같기도 한 황규백. 45살에 결혼했으나 아내는 오래 병중에 있다고 했다.

-수많은 사물 중에 왜 우산을 유달리 더 좋아하세요?

"딱 나 같아서요. 걸핏하면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젖은 채로 벽에 기댄 모양이 쓸쓸하잖아(웃음). 날 개이면 버려지고 버려진 대로 또 거기 있잖아요."

“나는 한 작품 그리는 데 일주일 걸려요. 하지만 그렇게 그리기 위해 88년이 걸렸어요.”/사진=이태경

-그런데도 기쁘다, 재밌다, 행복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는 뭔가요?

"사실이니까요. 나는 작업하는 게 정말 기뻐요. 그림을 걸어놓고 보는 게 정말 좋아. 행복해. 얼마 전엔 전시회 한다고 갤러리에서 내 그림을 다 가져갔는데, 꿈과 상상의 벽에 사라지니 지옥이 따로 없더군. 다시 돌아와 만나니 살겠어요(웃음). 아름다움은 영혼을 맑게 해요. 그러니 삶에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 되지. 허허."

국제적 명성에 비해 한국에서 덜 알려져 섭섭하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 충분해. 마굿간에서 전시해도 좋은 작품은 다 알아본다고(웃음)."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황규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었다. ‘황규백만큼 미국 화단과 세계화단의 중심 깊숙이 파고든 사람도 없다. 실제로 뉴욕에 가보면 황규백의 명성 은 더 절대적이다. 그의 판화는 미술계에 피상적인 외부구조가 아니라 그들의 생활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평생 확대경과 송곳 바늘을 쥐고 느린 거북이처럼 동판에 풀의 농담을 아로 새기던 그가 이제는 일필휘지로 사물의 정취와 마음의 풍경을 쏟아낸다. 한국땅에서, 황규백의 평화로운 그림을 볼 수 있어 참, 좋다. 그의 표현대로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15/201903150251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