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굵고 힘 있는 선으로 ‘나’를 그리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정로즈 2019. 4. 24. 14:55

자유·평등 외쳤던 신여성… 굵고 힘 있는 선으로 ‘나’를 그리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③ 수원 행궁동 나혜석의 흔적 / 시흥·용인군수 지낸 아버지 덕에 / 유복한 환경서 자라며 日 유학도 /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로 명성 / 세계 여행 중 외도·이혼… 고립된 삶 / 자전소설서 “여자이기 전에 사람” / 도덕·관습의 굴레에 과감히 맞서 / 실제 얼굴과 달리 '강한 자화상' 그려 / 진보적인 내면의 자아 상징적 표현

                    
       
#작고 소소하지만, 영혼이 느껴지는 행궁동

“행궁동에서 만날까요?” 대학 후배와 약속 장소를 정하는 통화였다. 후배는 멋진 곳으로 나를 안내하고 싶다며 경기 수원시 화성행궁 바로 옆에 자리한 동네를 제안했다. 아담한 주택이 모여 있는 곳을 최근 재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변화시켜 활기가 넘친다고 했다. 마침 집에서도 가까워 알았다며 길을 나섰다.

처음 방문하는 행궁동은 화성행궁을 중심으로 낮은 둘레길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문화재 보호 개발 제한 구역이라 1970∼80년대에 지은 키 작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주택들 앞에는 화분이 내놓아져 있고 아이들은 뛰어논다. 수수하면서도 따듯한 감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동네였다.

주택들 사이로 개성 있는 카페와 공방들을 보니 삼청동의 옛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대기업 플래그십 스토어가 즐비하지만, 행궁동 같은 때가 있었다. 작고 소소하지만, 영혼이 느껴지는 그런 곳. 삼청동에서 1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한 나는 그 모습이 항상 그립다.

덕분에 나는 행궁동 골목골목을 누비며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후배가 배가 고프다는데 좋은 곳을 골라 들어가자는 핑계로 계속 걸었다. 그러다 나는 ‘나혜석 생가터’라는 기념비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나혜석이 그린 자화상. 실제 모습과 닮지 않아 더 많은 이야기와 해석의 여지를 가진 작품이다.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제공

#나혜석,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의 탄생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은 일제강점기가 시작하던 무렵인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행궁동 골목을 걷다 보면 나혜석의 생가터도 학교를 오가던 길도 쉽게 만나 그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사법관 벼슬 출신으로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아버지 덕에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거기에 예술적 재능과 영특함을 갖춰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 최초의 조선인 여학생이 됐다.

나혜석은 고희동(1886~1965), 김관호(1890~1959), 김찬영(1893~1960)에 이어 네 번째로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운 사람이었다. 그는 귀국 이후 정신여학교 미술 교사로 근무해 후학을 양성하는가 하면 서울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서울 최초의 유화 개인전을 열었다. 관람객 5000여명이 다녀간 것으로 알려진 이 전시장 밖에는 줄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작품 판매도 20여점이나 이뤄졌다고 하니 얼마나 성공적으로 개최됐는지 알 수 있다.

나혜석은 이렇게 활발히 활동하며 한국 미술사에 서양화 선구자로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화가보다 근대 신여성의 효시로 더 자주 등장한다. ‘여자계’라는 잡지를 창간해 신여성의 삶과 사상에 대한 힘 있는 글로 전통적인 여성관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서점가에 불고 있는 페미니즘 유행 덕분에 이 글들을 엮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이라는 책을 읽었다. ‘나혜석 생가터’라는 기념비 앞에 멈춰 섰던 것도 이 책에서 읽었던 인상 깊은 문구들이 눈앞을 스쳤기 때문이다.

#나혜석, 세계 여행을 떠난 길에서 스캔들 중심에 서다

나혜석은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영향력 있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울 시립 무연고자 병실에서 아무도 모르게 삶을 마감했다. 나혜석으로 추정되는 이의 사망 사실이 이듬해 국가에서 발행하는 행려사망 항목에 기재돼 있을 뿐이다. 이렇게 그의 삶이 급변한 출발선에는 당시 많은 이를 자극한 이혼 사건이 있었다.

나혜석은 외교관이었던 김우영과 결혼식을 올리면서부터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전도유망한 엘리트들의 만남이었던 이유도 있지만, 나혜석이 김우영에게 제안했던 결혼 조건 때문이었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줄 것 등을 포함한 것으로 당시에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나혜석은 김우영과 함께 일본 외무성에서 보내주는 일종의 위로 출장으로 세계 여행길에 오른 뒤 다시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된다. 파리에 머무르며 유학생 최린과 인연을 맺은 것이 알려져 부부가 이혼에 이르게 됐기 때문이다. 이혼이 흔치 않던 시기에 여자에게 귀책사유가 있다 하니 편견 섞인 조롱이 쏟아졌다.

그는 이혼 이후에 ‘이혼고백서’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이는 당시 부정적 반응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도가 텄던 사람이었음을 알게 하는 글이지만 나혜석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좌절케 했던 글이기도 하다. 그 때문일까? 첫 개인전에서 수십 점의 작품이 팔려나갔던 그임에도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은 몇 되지 않는다. 
수원시에 있는 나혜석의 생가터의 모습. 주변에 나혜석을 주제로 한 벽화가 많이 있다.
김한들 제공

#나혜석의 자화상에서 보는 나혜석, 사르트르, 보부아르, 그리고 자유를 갈망했던 모든 청춘

나혜석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며 길을 걸었다. 화가로서 한국 미술 발전에 기여한 것이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을 토로했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또는 ‘페미니즘’이라는 주제 외에도 다양한 연구가 이뤄질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혜석은 자전적 소설 ‘경희’에서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고 썼다. 그도 아마 성별과 상관없이 화가 나혜석과 그의 작품 세계로 온전히 보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나혜석의 작품 세계는 세계 일주를 다녀온 뒤부터 독자적 성격을 띤다. 파리의 아카데미 랑송에서 8개월간 수학하며 야수파의 표현 기법에 입문하고 다루는 주제도 다양해졌다.

나는 아직 나혜석의 작품을 실제로 본 적이 없음을 고백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후배는 마침 근처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 나혜석홀이 있다며 안내했다. 2015년 작가의 유족들이 미술관에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을 기증하면서 만들게 된 공간이라고 한다.

나혜석홀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작품은 ‘자화상(1928)’이었다. 사진 속에서 동글고 선이 고왔던 나혜석의 얼굴이 캔버스 위에서 우뚝하고 각지게 표현돼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실제 생김새와 이렇게 다르게 자화상을 그린 것인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나는 그렇게 나혜석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와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를 떠올렸다. 자유를 구속하지 말 것, 다른 연인을 사랑해도 질투하지 말 것, 글 쓰는 삶을 지지해 줄 것을 조건으로 자유에 대해 끝없이 토론하며 계약 결혼을 유지했던 이들이다.

두 사람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고 난 뒤 소중한 ‘나’의 존재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펼쳤다. 이 두 사람으로 인해 사람들은 나의 자아도 자유도 온전히 존중받아야 함을 알게 됐다. 온전히 존중받기 위해서는 책임감을 느껴야 함도 깨달았다.

나혜석은 어쩌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언급한 ‘경희’의 구절 뒤에는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란 말이 나온다. 한국의 여인이 아닌 전 세계의 개인으로 당시 파리의 실존주의에 비춰 그의 삶을 바라보면 이상하거나 남다를 것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작품이 외면에 얽매이지 않고 내면의 자아를 진정한 자기 모습으로 여기고 그린 것이라고 보였다. 진보적이었던 자신을 굵고 힘 있는 선을 통해 상징적으로 담아내려 했던 것이다.

나혜석에 대한 이런저런 대화를 더 나누고서야 미술관을 나섰다. 후배는 둘레길을 바라보며 수제 맥주를 마시는 펍에 가자고 했다. 차를 끌고 나섰던지라 그날은 거기서 인사를 하고 헤어져야 했다. 봄꽃이 필 무렵, 혼자 행궁동의 길을 걷고 나혜석홀도 수제 맥주 펍도 다시 가볼 예정이다. 나혜석이 건너편에 앉아 나와 맥주를 마셔 줄 것 같다는 상상을 하니 기대되는 봄이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학교 미술관·박물관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