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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참된 어른을 찾기 전까지…고흐는 의자를 비워뒀다

정로즈 2020. 1. 19. 13:52

고흐의 빈 의자

빈센트 반 고흐의 ‘빈 의자’ 그림들은 어른다운 ‘따뜻함’이나 ‘권위’의 부재를 은유한다. 그는 ‘빈센트의 의자’(1888·위)나 권위의 상징이라 할 팔걸이가 있는 ‘고갱의 의자’(1888·가운데)나 모두 ‘빈 의자’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고흐는 생의 마지막 해에 그 빈 의자에 ‘울고 있는 노인’(1890)을 그려 넣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빈 의자’ 그림들은 어른다운 ‘따뜻함’이나 ‘권위’의 부재를 은유한다. 그는 ‘빈센트의 의자’(1888·위)나 권위의 상징이라 할 팔걸이가 있는 ‘고갱의 의자’(1888·가운데)나 모두 ‘빈 의자’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고흐는 생의 마지막 해에 그 빈 의자에 ‘울고 있는 노인’(1890)을 그려 넣었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의자’라 이름 붙인 두 점의 유화를 남겼다. ‘빈센트의 의자’와 ‘고갱의 의자’가 그것이다. 두 그림 모두 의자가 가장자리까지 꽉 들어차서 보는 이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고흐와 고갱이 완전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는 듯 두 그림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예외가 있다면, 사람은 없고 그들을 상징하는 물건들만 놓여 있다는 점이 같을 뿐이다. 고흐는 아를의 ‘노란 집’에서 고갱과 만난 후 처음 이 의자들을 그렸다. 고갱이 떠난 후 이 그림들에 계속 매진했고, 완성한 후에는 또 다른 ‘빈 의자’ 소묘 다섯 점을 남겼다. 

■ 고갱의 팔걸이의자 

일상생활·미술에서도 고갱의 영향 받은 고흐 
고갱의 의자는 ‘권위’ 상징하는 팔걸이 있는 의자로 그려

‘빈센트의 의자’는 푸른색 바탕에 노란색으로 대낮이 배경이다. 고흐가 즐겨 사용하던 담배와 파이프가 놓여 있다. 반면 ‘고갱의 의자’에는 밤을 배경으로 두 권의 책과 촛대 두 개가 놓여 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이런 구체적인 묘사 외에도 특징을 잡아 한마디로 두 의자를 일괄했다. 자신의 것은 나무의자, 고갱의 것은 팔걸이의자라고. 

‘고갱의 의자’는 19세기 이래 영국에서 유행한 ‘클리스모스’풍 ‘리전시 양식의 팔걸이의자’였다. ‘클리스모스’란 다리가 활처럼 휘어져 있는 고대 그리스 의자를 말한다. 고대 그리스의 석관이나 묘비의 부조, 도자기 그림, 벽화, 문학이나 철학 작품 등을 통해 종합해 볼 때 당시 의자는 총 다섯 종류였다. 등받이와 팔걸이가 모두 있는 ‘스로노스’, 팔걸이 없이 등받이만 있고 다리가 곡선인 ‘클리스모스’, 등받이와 팔걸이가 모두 없는 ‘디프로스’, 접이식 의자인 ‘오크라디아스’, 매트를 얹고 기대어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할 수 있는 ‘클리네’. 이 기본 범주는 약간의 변형만 있을 뿐 지금도 그대로다

이 범주로 보자면 ‘고갱의 의자’는 다리가 휘어져 있는 ‘클리스모스’이지만, 또한 팔걸이가 있기 때문에 ‘스로노스(thronos)’에 해당한다. ‘스로노스’는 영어에서 보통 ‘보좌’로 번역되는 ‘throne’의 뿌리어다. 호메로스의 글에서 이 ‘보좌’는 발 받침대와 한 쌍을 이루어 신이나 왕의 권위를 상징했다. 그리스 기념물에서 신이나 왕, 영웅, 때로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권위가 부여될 때 그들에겐 보좌가 있다. 예를 들어 제우스는 보좌에 앉고 다른 신들은 ‘클리스모스’에 앉은 것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또한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그리스 교사들도 보좌에 앉아 가르쳤다. 그런 점에서 보좌에 해당하는 고갱의 ‘팔걸이의자’는 권위를 드러내는 수단이다. 

고흐는 ‘노란 집’에 화가 공동체를 만들 목적으로 10여 개의 의자를 미리 장만해 두었다. 하지만 고갱이 합류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궁색한 살림에도 기꺼이 팔걸이의자를 보탰다. 고흐는 앞서 고갱을 수도원장으로, 자신은 평범한 수도승으로 생각하겠노라 약속하고 그를 초대했었다. 그리고 수도승처럼 고흐는 헌신적으로 고갱의 권위를 따랐다. 자신보다 다섯 살 연상인 데다 회계사로서의 사회 경력도 믿음직스럽고 그의 그림도 자신보다 인정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다 여겼다.

이런 제의를 받아들인 고갱은 ‘노란 집’에 내려와 가사를 처리하고 체계를 잡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림의 원칙도 제시했다. 고갱의 권위가 고흐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친 것만큼 고흐의 미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함께 있었던 두 달 동안 고갱의 영향을 받은 고흐의 그림들이 다수 보인다. 하지만 그런 기대도 잠시, 둘은 계속 다투고 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 고흐의 빈 의자 

반면 ‘빈센트의 의자’는 팔걸이가 없는 직선의 다리로 되어 있다. 그리스식 의자 유형으로 보자면 특별히 속할 데가 없다. 그런데 고흐는 테오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과 자신의 의자가 모두 ‘빈 의자’임을 거듭 강조했다. 

‘빈 의자’의 체험은 고흐가 스물다섯 살 되었을 때 일어났다. 고흐는 미술상으로서 실패한 뒤 자신의 여린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방법으로 증조부와 조부, 아버지가 걸었던 목회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신학생이 되기 위해서 예비 어학 공부에 전념했지만 그 공부는 너무 따분하고 어려웠다. 결국 1878년 8개월 만에 신학 준비 과정을 포기하고 평신도 설교자가 되는 길로 바꾸었다. 하지만 그동안 공부방에 찾아와 지도해 주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고흐는 바로 이때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아버지의 ‘빈 의자’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 편지에 따르면, 고흐는 아버지를 역까지 배웅한 후 기차가 떠나고 그 모습이 다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플랫폼에 서 있었다. 자신의 방에 돌아오자 이제는 필요도 없는데 전날과 다름없이 책과 잡지들은 무심한 듯 그대로 남아 있고, 아버지의 텅 빈 의자는 책상에 바짝 당겨져 있었다. 고흐는 빈 의자를 바라보며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곧 다시 만날 거라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난 그때 아이처럼 슬펐어.” 

아버지의 빈 의자라는 이미지가 책상 앞에서 갑자기 떠오른 것은 신학 공부를 결심하기 전, 그러니까 20대 초반의 체험과도 관련된다. 열일곱 살 때 고흐는 다니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와 처음 시작한 일이 있었다. 삼촌이 운영하는 미술상 점원 생활. 4년여 동안 성실하게 일하자 스물한 살에 런던 지점의 물품 창고 일을 맡아 전근 가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다음 해 파리 지점으로 임시 파견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가 그다음 해에 파리로 다시 전근을 갔다. 이렇듯 빈번하게 오간 것은 런던 하숙집 딸에게 실연의 아픔을 받은 데다 테오의 친구 두 명이 자살하고 지인 한 명이 죽는 등 우울한 소식들이 연일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흐는 파리로 전근 간 다음 해인 1876년에 해고당할 상황에서 먼저 사직서를 제출했다. 고흐는 이 시절 외로움과 무기력 속에서 성서와 찰스 디킨스(1812~1870)의 글을 의지했다고 한다. 테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빈센트의 의자는 디킨스의 죽음 애도한 루크 필즈 ‘빈 의자’서 영감
자신에게 큰 ‘권위’였던 아버지·디킨스와의 ‘작별’을 빈 의자에 내포

삽화를 그리면서 디킨스를 알게 된 루크 필즈는 디킨스가 죽던 날 방에서 빈 의자를 보았어. (…) 텅 빈 의자는 아주 많아. 그 수는 늘어날 거야. 조만간 빈 의자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빈센트 반 고흐, <편지>) 

루크 필즈(1843~1927)라는 화가는 디킨스가 죽자 그를 애도하며 그림 한 점을 그렸다. 이것이 영국 사회에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는 원래 삽화가로 시작해서 유화 화가로 유명해진 인물인데, 디킨스로부터 삽화를 부탁받았다. 함께 작업을 하다가 필즈는 디킨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마음을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그게 바로 ‘빈 의자’였다. 

고흐는 런던 근무 당시에 루크 필즈의 ‘빈 의자’를 보았는데, 아버지가 떠난 자리에서 그 이미지가 오버랩되었다. ‘빈 의자’라는 이미지에서 그동안 자신에게 큰 권위로 여겨졌던 두 사람의 부재가 슬픔으로 다가왔다. 아버지와의 일시적인 작별과 디킨스와의 영원한 작별은 빈 의자가 내포하고 있는 헤어짐의 미학이었다. 고흐의 아버지도 1885년 갑작스럽게 이 세상에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 고흐의 아버지 ‘페르 탕기’ 

또 다른 아버지 화구상 탕기에겐 ‘권력’과는 다른 ‘진정한 권위’ 느껴

고흐가 친아버지 외에 일생에 한 번 아버지라 부른 인물이 있다. 2년간 파리에서 알게 된 화구상 탕기 영감(줄리앙 탕기, 1825~1894)이다. 당시 고흐의 상황은 1886년 2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나타난다. “1885년 5월 이후 (지금까지) 따뜻한 식사를 해본 건 여섯 번밖에 없어.” 거의 9개월간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못한 고흐를 탕기 영감은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함께 먹고 대화를 나누며, 때론 그의 신세에 한탄하고 때론 그의 재능에 탄복했다. 종종 고흐가 캔버스, 물감, 붓 등 화구를 집어들고 돈 대신 그림들을 내밀면 마치 그 그림의 진가를 인정한 듯 받아주었다. 탕기 영감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고흐의 그림들을 자신의 화방에 전시하여 파리 화가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자식을 챙기는 따뜻한 마음으로 고흐가 파리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니 많이 이해해달라고까지 당부했다. 그런 그에게 파리 화가들이 ‘탕기 아버지(Pere Tanguy)’라 호칭했듯이, 고흐도 “나의 친구이자 아버지”라 부르며 마음을 담아 총 세 점의 초상화를 남겼다. 


고흐의 ‘페르(아버지) 탕기의 초상화’(1887). 화구상 줄리앙 탕기는 고흐가 친아버지 외에 “아버지”라고 불렀던 유일한 인물이다.

고흐의 ‘페르(아버지) 탕기의 초상화’(1887). 화구상 줄리앙 탕기는 고흐가 친아버지 외에 “아버지”라고 불렀던 유일한 인물이다.


고흐에게 절박했던 것은 열일곱에 그만둔 학교 졸업장이 아니었다. 어디를 가나 인생을 먼저 산 어른들의 따뜻한 마음이 필요했다. 하지만 고흐가 10대 이후 만난 어른들은 무엇이든 하라고 닦달만 할 뿐이었다. 미술상인이 돼 돈을 벌든가 최고의 목사가 되어 존경을 받든가, 아니면 유명한 화가가 되어 세상의 이목을 끌든가 하라는 식이었다. 심지어 고흐의 재능을 알아봤으면서도 그의 실력을 시샘하여 그의 약점을 들춰내는 어른도 있었다. 정작 고흐에게 필요한 어른은 돈을 많이 버는 자도 아니고, 신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회화의 원칙을 세워 규정하는 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고여 있는 그 잠재력의 막힌 물꼬를 터주기만 하면 감사할 지경이었다.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자식을 낳은 어른은 진정한 권위를 지닌다. 권위(authority)의 라틴어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는 ‘만든 자’ 또는 ‘낳은 자’인 ‘아욱토르(auctor)’에게 부여된 성질이다. 무엇을 창작해 낸 자(author)에게는 그 작품에 대해 통달하고 한결같은 어떤 능력이 있다. 그게 바로 권위다. 보좌를 만든 고대인들처럼 고흐는 바로 이런 권위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바라는 길을 가지 않는다고 등을 돌린 아버지에게도, 또한 피를 보기까지 온통 통제하고 자기 방식만 고집하는 선배에게도, 권력이라면 모를까 달관하고 일관된 그런 권위는 없었다. 

■ 울고 있는 어른 

의자에 걸맞은 ‘권위’ 찾지 못한 고흐, 죽기 전 2년 동안 빈 의자 그려
눈감던 그해, 남겨뒀던 빈 의자에 ‘울고 있는 노인’ 앉혀

고흐는 죽기 전 2년 동안 ‘빈 의자’를 열심히 그렸다. 지상의 어디서도 그 의자에 걸맞은 진정한 권위를 보기 힘들었다. 참어른이 없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위선자들, 질투와 시기의 눈으로 꼬투리 잡아 숙청하는 혁명가들, 뭔가 선심 쓰듯 던져주고는 더 큰 잇속을 챙기는 선동가들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죽던 해 고흐는 남겨두었던 ‘빈 의자’에 한 사람을 앉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휑한 머리를 숙인 채 ‘울고 있는 노인’. 그 어른을 찾기까지 고흐는 빈 보좌를 남겨두었다.

고흐가 떠난 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참된 어른을 기다리고 있다. 아마 더 나이 들고 머리가 하얗게 세거나 빠지더라도 그 마음은 더더욱 간절할 것이다. 그렇게 시대의 아버지가 절실했던 빈센트 반 고흐가 ‘현대미술의 아버지’가 되었다. 권위를 기다리며 그가 비워둔 ‘보좌’에는 이제 그의 권위가 빛난다. 

나는 세상에 많은 빚과 책임을 지고 있다. (…)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예술적 취향을 만족시켜 주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다.(빈센트 반 고흐, <편지>)

우리의 비워둔 ‘보좌’에 이런 어른을 모시고 싶다. 한평생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이런 어른이 되기 위해 산다면. 우리도 그때까지는 구석 한 칸에 ‘빈 의자’를 남겨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필자 김동훈  

[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의 물질인문학](21)참된 어른을 찾기 전까지…고흐는 의자를 비워뒀다

 
서울대 서양고전학협동과정에서 희랍과 로마 문학 및 로마 수사학을 공부했고, 현재 고려대 대학원에서 플라톤과 키케로를 연구하고 있다. 서울대, 철학아카데미, 푸른역사아카데미 등에서 라틴어 원전 강독 및 그리스어·라틴어를 강의했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인문 분야 화제의 방송이었던 ‘별별명언’을 진행했으며, <별별명언: 서양 고전을 관통하는 21개 핵심 사유> <브랜드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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