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생의 정점도 내리막길도 다 겪었다, 巨匠의 나약하지만 정직한 고백

정로즈 2020. 2. 5. 10:20

['기생충'과 경쟁하는 2020 아카데미 후보작] [3] 페인 앤 글로리

스페인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자신의 삶 투영해 영화로 제작
외국어영화상·남우주연상 후보

우리는 모두 아파야 낫는다. 오늘(5일) 개봉하는 영화 '페인 앤 글로리'는 잔인한 세상을 그럼에도 끝까지 살아내야 하는 이유를 말한다. 스페인 출신의 거장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자신의 삶을 투영한 작품. 작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겨뤘던 작품으로, 9일(현지 시각) 열릴 미국 아카데미상의 외국어영화상과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능력과 에너지가 충만한 예술가가 자신만만하게 지어낸 '스타일리시'한 결과물이라면, '페인 앤 글로리'는 그 반대편에 서 있다. 느긋하고 지긋하게 세상을 관조한다. 둘 중 무엇이 낫다고 말할 순 없겠으나, '페인 앤 글로리'가 생의 정점도 내리막길도 겪어본 이가 지어낸 랩소디임은 분명하다.

유명 영화감독 말로의 어린시절(왼쪽)은 동굴에서 살았을 만큼 가난했으나 충만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저앉지 않았던 어머니(가운데)가 있어서였다. 나이 든 거장은 이제 자신의 모든 뿌리가 어머니였음을 고백한다.
유명 영화감독 말로의 어린시절(왼쪽)은 동굴에서 살았을 만큼 가난했으나 충만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저앉지 않았던 어머니(가운데)가 있어서였다. 나이 든 거장은 이제 자신의 모든 뿌리가 어머니였음을 고백한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 '나쁜 교육' '귀향' '내가 사는 피부'에 이르기까지 평단의 찬사를 한몸에 받아왔던 알모도바르는 올해 71세가 됐다. 살아온 날이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많다고 여겨질 때다. 이 시점에서 알모도바르 감독은 독백을 시작한다. 나는 누구였나. 앞으로 나는 누구일까. 우리는 그 고백에 숨을 죽인다.

유명 영화감독인 살바도르 말로(안토니오 반데라스)는 몸과 마음이 쇠약하다. 영화를 다시 찍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도 종종 사로잡힌다. 자신의 작품 회고전이 열릴 무렵, 말로는 한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배우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아)를 만나고, 새로운 경험에 눈뜬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우리를 상처와 대면하게 만든다. 주인공 말로의 몸엔 커다란 수술 자국이 있다. 그의 육체는 절정기의 그것이 아니다. 쇠잔한 육체는 말로를 집 밖으로 나서기 두렵게 한다. 그가 화려하고 근사한 아파트에 갇혀 서성거릴 때 우리는 이 영화가 이미 많은 고백을 풀어놓고 있음을 직감한다.

시간을 넘나드는 교차 편집은 전형적이지만 현실과 과거의 기억을 가장 생생하게 비추는 방법이다. 나이 든 말로가 눈을 감으면 별처럼 검은 눈동자를 빛내는 어린 말로가 우리 앞에 서 있다. 한때는 가난했고, 지독한 사랑에도 빠져봤으며, 죽는 게 나을 만큼 외롭기도 했던 한 남자. 알모도바르 감독은 그를 통해 우리를 비추고, 우리 눈을 통해 또한 그를 비춘다. 우리는 공평하게 늙어가고 있으며, 결국 시들 것이지만, 그렇기에 마지막 한 소절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 몸부림치는 존재다. 영화는 113분 동안 유유히 강물처럼 흘러간다. 그 기슭의 끝에서 말로의 첫사랑과 마주할 때, 누군가는 눈을 질끈 감게 된다. 강렬하고 아찔하다. 아련하고 아릿하다. 알모도바르의 상처와 빛이 남김없이 드러난다.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9번이나 알모도바르 감독과 호흡을 맞춘 배우다. 그는 스크린에서 대개 격정과 활력으로 빛났으나, 이 영화에선 곧 부서져 내릴 듯하다. 말로의 어머니 하신타를 연기한 페넬로페 크루스는 과거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그랬듯 백합꽃처럼 순결하고 엉겅퀴처럼 끈질기다. 크루스를 보고 있노라면, 알모도바르 감독이 얼마나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표현해 온 예술가였는지를 다시 깨닫게 된다. 그는 이번에도 자신의 뿌리와 끝이 어머니이고 여성이었음을 말한다. 나약하고 정직해서 눈부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2/05/20200205001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