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제 답 사

금산 보리암에 가다

정로즈 2022. 7. 19. 15:30

금산 보리암에 가다

 

  2012년 7월8일 문화재 지킴이의 심화교육으로 남해 보리암 다랭이논 왕후박나무를 돌아보았다.

금산은 능개가 피어오르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 앞만 보고 걸어서 오르는 보이는 만큼의 시야에는

금산의 정상이 보이지않았다.

 희색빛 짙은 안개 속으로 문지회 회원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는 그 뒷 모습을 좇아 찾아오르는

보리암은 나에게 많은 것을 회사(悔謝)했다.

701m 높이의 금산(錦山)은 태조 이성계가 장군이었던 시절, 금산을 오르는 길에서 점을 보았던 것이다.

점쟁이가 펼처놓은 글자 중에 하나를 집어라고 하여 집은 것이 물을 문(問)자 였다. 대뜸 점쟁이가 하는 말, "좌문우문 걸인지상(座問右問 乞人之像)"이란다. 이성계를 알아보지 못하는  점쟁이의 목을 칼로 내려치려다가 잠시 생각을 바꾸었다. 자기의 덕이 부족함을 깨닫고 금산에 가서 100일 기도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점쟁이를 찾았다. 그때도 역시 물을 문자를 뽑았다. "左問右問 君王之像"이라하지 않는가. 그 뒤 이성계는 신령의 도움으로 이씨조선을 건국하였고, 보은으로 보광산을 금산이라 바뀌게 되는데 태조는 이 산을 비단으로 둘러치라고 했지만 재치있는 신하가 산 이름만 비단금자(錦)가 들어가게 하였다고 한다.

몇차레 와서 보았지만,  오늘같은 운무속에서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풍광은 말할 것도 없고, 명승 제29호인 금산 정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곳을 찾지 않을 수 없었는데 가파른 계단은 절벽에 붙어있는 외진 길같은 돌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어렵게 그자리에 닿았다. 작은 전각이 능선 위에 서있는데 현판이 선은전(璿:아름다울 옥 선 恩殿)이다.산신령의 은혜를 받아 나라를 세운 것을 기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기도했다는 굴 입구에는 아무 표지가 었고, 큰 바윗돌이 높이 솟아 있어 그 아래에서 면벽기도를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라 시대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지만 이렇다할 문화재는 없지만  마치 자그마한 삼층석탑이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오히려 낙산사 홍련암과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3대 기도처로 널리 알려지면서 신도들과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삼층석탑에 10월짜리 100원짜리 동전들이 기단에 놓여있는 것은 잘못된 기도라고 본다. 

 

 기형도의 시 '안개'가 생각난다. 그래도 나는 지옥으로 들으가는 느낌이었다.

헉헉 거리며 풀잎에서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철석이는 파오의 매릉 맞으며 앞에 가던 사람이 안개 속에 가려 ...

으시시 무섭기도 했다.

 

금산의 절벽에 위치한 사찰 보리암엔 바다가 보이는 사찰 앞쪽에 해수관음상과 보리암전삼층석탑이 위치하고 있다.

 

    

 

10원짜리 동전을 바위에 봍여놓고 뭘 빌고 갔을까?

기복신앙에서 탈피하여 이제는 이웃을 위하는 기도는 어떨까 .....

해수관음보살에게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을 꼭 들어준다고 하지..

무슨 기도를 할까 ?

             

 

 

 

 

 

 

짙은 아개와 운무때문에 금산에 있는 자연의 조각품을 볼 수 없었던 것이 많이 서운하다.

어쩌랴! 주세봉 선생의 글이 새겨진 문장암과 신라시대 고승들이 수도한 자리 좌선대, 진시황의 아들이 유배되어 살앗다는 부소암

화엄봉 일월봉이 있다.

맑은 날 등정을 할 수 없는 아픈다리로 나는 헉헉거리며 땀을 닦으며 동행하는 회원들을 바싹 붙어서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