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나의 흔적

이미지의 정제된 여정 - 윤규홍 예술사회학

정로즈 2008. 9. 16. 21:27

화가를 따라 떠나는 그곳 - 이미지의 정제된 여정

                         윤 규 흥  (예술사회학)

 

정세나는 시인이자 화가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학을 전공하고 문예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교류를 펼치다가 비교적 늦은 나이에 화단에 이름을 알린 서양화가이다. 그래서인지 정세나는 왜 자신이 그림에 애착을 가지는지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녀는 그 설명을 그림으로 재현하기도 하고, 거꾸로 시에서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가 이러한 자기 기술(記述) self description 의 맥락을 알고 나면, 작가의 그림은 훨씬 의미가 명료해진다. 하지만 개인전시회라고 하는 미술제도 안에서 정세나는 그림 자체만으로 자신의 작가 감성과 예술 기획을 수용자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문학적 기술의 도움 없이 미술 작품이 한 예술가의 표현 속에 독립된 완결체로서 의미를 지녀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전시회에는 그 조건이 충분히 채워졌다. 그것은 스타일의 문제다.

사실, 미학과 같은 예술 이론에서 설명하는 방식에도 불구하고, 스타일은 모호한 개념이다.

스타일은 예술 작품이 어떤 기준으로 보아 ‘그럴듯함’과 ‘거기서 벗어남’ 양자 모두를 규정한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쌓여온 예술 흐름의 정보가 압축된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예술 자체의 흐름을 구분하고 이름 붙이기를 시도한 미학은 과거에 대한 회고와 분석은 역사성을 강조하면서 스타일을 분류했다. 하지만 동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예술의 역동성이나 안정성을 스타일에 빗대어 이해하기에는 미학이 자부하는 예술에 대한 조망권은 낡은 것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정세나의 회화 작품을 비평한다면, 어디에 논리의 초점을 맞추어야 되나? 그것은 그녀의 작품을 미/추의 도식으로 볼 것인지, 진부함/새로움의 구분으로 볼 것인지, 평가를 내리는 행위이다.

회화의 역사에서 풍경화와 관련한 스타일은 존재해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풍경화를 통해 얻는 미적 쾌의 효용은 매우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풍경화의 성공적인 정착은 예술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 양자의 과잉 상태를 불러일으키며 매너리즘을 만들어 내었다. 지나치게 일반적인 감성과 해석에 기대게 된 풍경화는 스타일의 쇠퇴를 불러왔다. 그리고 더 이상 미술의 전위에서 회화의 여러 경향들을 끄는 위치에 올라서지 못하게 되었다. 순수 회화라는 문화주의적인 장르 구분 속에서, 풍경화는 순수하다기보다는 순진한 낭만성이 더 부각되면서 화풍을 꾸준히 형성해 왔다. 정세나의 스타일은 기본적으로 한국 근대 회화의 한 부분을 떠받힌 대구 화단에서 앞산과 대명동을 축으로 하는 일련의 화풍 속에 놓여 있다.

정세나는 본격적인 미술 활동을 하지 않았을 무렵에도 그림과 완전히 격리되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가질 당시에 이미 그녀는 딜레탕트의 난점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에 선 작가의 그림은 당연하게도 변화가 있다. 그녀의 붓질은 두껍고 힘이 있다. 예컨대 산세를 표현할 때에 한 골짜기와 다른 골짜기, 낮은 언덕과 가파른 절벽을 서로 다른 각도로 대담하게 선을 긋는다. 매우 비하적인 표현인 여류(女流)의 편견에서 충분히 자유로운 묘사는 작가 스스로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선천적인 창작욕구에서 비롯된 힘이다. 그녀가 쓴 한 편의 시 속에 다음과 같은 독백체의 구절이 있다. “푸른 갤러리에서/전시하고 싶은 나를/바람과 낙엽들이 밀어 넣는다./텅 빈 쇼윈도우에” 이 시어는 작가의 삶이 예술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안으로 가둘 수 없는 힘 앞에 무력하다는 것을 비춘다. 그러므로 정세나의 그림이 일견 행복한 감성으로 충만해 보인다는 인상은 잘못된 생각이다. 작가가 펼쳐놓은 캔버스 위의 봄여름가을겨울은 스스로에게는 매우 치열한 세계이다.

작가의 그림은 점점 간략한 형태로 변화해가고 있다. 대신, 강약과 색의 대비, 자연과 그 속의 사람 등이 절도 있게 강조미를 더해간다. 정통적인 풍경화가 허용하는 형식적 틀 내에서 가급적 단순하게 표현한 산과 들은 그 제한된 정보를 더욱 명료하게 나타낸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겨진 아름다운 풍광이 그 이미지의 핵심만 뚜렷하게 회상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기억에 쉽사리 다가갈 수 없다. 화가는 그림을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라 여러 빛깔로 채색되어 아름다운 그곳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우리는 기어이 그 나들이에 나설 준비를 하고 만다. 한 폭의 그림에서 다른 한 폭의 그림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겨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흩어져 있는 공간을 하나로 구성한다. 우리가 꿈꾸던 그곳, 힘든 현실을 위로해주는 그곳, 내면이 영원한 가시성으로 보장되는 그곳, 그 공간이 여기 이 화폭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