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나의 흔적

'점새'를 통해 본 남정(南汀)의 시세계

정로즈 2008. 9. 16. 22:58

현실과 이상, 그 갈등과

소통에의 열망

‘점새’를 통해 본 남정(南汀)의 시세계

 

           李 一 基

 

 

시는 언어에 의해 표현하는 이른바 언어 예술이다. 그러기에 시를 써고 표현하는 데는 언어적 한계를 절감할 때가 허다한 것이 시인들의 공통된 고통이다.

그러한 언어의 구애를 받지 않고, 언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자유로운 표현을 실현하고 있는 예술도 많다. 이른바 문학을 제외한 음악이 그렇고 그 중에도 캔버스에 쏟아재는 화가의 화필이 그러하다.

남정(南汀) 정세나 시인은 시를 써는 시인이지 �씬 이전에 화폭에 자신의 예술혼을 담아내고 있는 화가이기도 하다. 화가와 시인, 아니 시인과 화가의 겹친 창작행위는 남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이런 겸업 예술이 지닌 예술의 세계, 즉 화가이면서 시인인 南汀의 시 세계를 말하는 것은 필자의 능력으로는 버거운 일이나 다만 시를 써는 한 사람으로서 이 시집에 담고있는 시편들을 읽으면서 읽는 즐거움을 여기에 옮겨 보고자 한다.

화가의 그림이나 시인의 시가 연조와 시대, 시인의 환경과 개성에 따라 그 유형과 원숙미가 다르겠지만 작가의 주요 작품 하나를 통해 작가의 예술혼과 그 세계를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여기서도 좋은 시 한 편을 통해 이 시인의 시세계를 짚어보고자 한다.

이 시인의 여려 시편들 중에서 역작 ‘점새’를 들고자 한다.

시 ‘점새’ 는 싱의 분신(分身)이라기 보다는 화신(化身)처럼 보인다. 시인 자신의 인생과 예술혼을 집약해 담아놓은 작품이라 여겨진다.

먼저 이해를 구하고 싶은 것은 무릇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시에 있어서도 그 이해나 해설에는 결코 단언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읽는 이에 따라 제나름의 이해와 해석과 수용이 있을 뿐임을 먼저 밝혀 두고자 한다.

집 밖으로 나아가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날에는

네모난 방에서 꿈을 그린다.

 

시 ‘점새’가 펼쳐 보이는 첫째연이다. 첫연 3행을 읽노라면 저 유명한 소설 속에서 힘 없고 불안한 사랑을 세상으로부터 가리울 수 있는 보로막의 ‘사면의 벽’을 필요로 하는 그 공간을 떠올리게 된다. 시인은 그런 공간에서의 일탈을 바라며 ‘꿈을 그린다’는 것은 현실이라는 이상의 날빛과는 달리 소외와 단절의 잿빛 현실을 엿보게 된다.

이는 시인 자신만의 소외의식이나 현실의 단절이기 보다는 풍요 속에 단절과 적막을 동반하고 있는 현대인의 공통된 현실의 실성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시인은 남다른 자긍과 함께 한 시대의 대변자로서 자임하고 있듯이 말이다.

현대인의 소이의식과 단절된 현실은 이 시의 둘째 연에서 더욱 절묘하게 드러나 있다.

 

창 밖의 푸른 풍경 끌어들이고

밝고 투명한 햇살도 가져와

방안의 캔버스에 풀어놓고

점 하나 찍으면,

점은 곧 새가 되어 날아오른다.

 

어떤 행위에 있어 나는 것과 추락하는 것은 동의이질적(同意異質的) 상관관게가 있다. 즉 비상이 없는데 추락이 있을 수 없고, 추락은 언제나 비상의 예비요 시발이기도 한 것이다.

창밖의 푸른 풍경과 밝고 투명한 햇살을 끙어들여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방안의 캔버스’에 풀어놓고 점 하나 찍으면 그 ‘점은 곧 새(점=새)가 되어 상상의 창밖으로 나아가 어디론가 날아갔을 법하다.

여기에서의 새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자유’또는 현실을 벗어난 이상에의 ‘비상’임이 분명하다.

또 한편으로는 현대인이 겪고 있는 풍요 속의 소외와 적막이라는 현실 앞에서 이상과 또 다른 치열한 소통에의 열망이라는 현실적 모순을 시인 특유의 표현기법을 통해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대저 슬픈 자가 슬픔을 알지 ahts다는 역설처럼 시인은 표현의 자유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못한 제한적 현실 생활을 겨냥해 ‘자유를 열망하는 해의 날개 위에 /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덧칠한다’고 셋째연에서 외치고 있다.

시인의 이상과 꿈은 여려 갈래로 표출되겠지만 여리서 보는 시인의 중요한 꿈과 이상은 다름 아닌 자유를 열망하는 ‘새의 날개’가 지닌 그 ‘자유’에서의 비상임을 엿볼 수 있다. 그런 시인의 열망인 자유를 시인은 ‘창밖’이라는 비유를 쓰고 있다.

‘창밖’은 단순히 주택의 한 구조물로서 안과 밖을 경계 지우고 있는 창문의 밖이기 보다는 현실과 이상, 생활(Live)과 삶(Life), 아내와 어머니, 가정과 예술 등 현실적으로 양립된 벽의 경계로 한 또 다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아의식을 표출한 ‘그리워하는 꿈’이 아닌가 싶다.

새는 허공에서 퍼덕이다가

주저앉는다.

끝없는 작없의 외로운 몸짓으로

 

창밖을 그리워하는 꿈을 접고

나는 잠 하나에 내 일생을 바쳐

내 사랑을 생생하게 불어넣기에

하루는 너무 짧다.

 

이 시의 넷째연과 다섯째 연은 실로 시인의 눈물겨운 소망이요 비원(悲願)의 기구(祈求)가 가식없이 배어있는 시가 아닌가 싶다.

‘점 하나에 내 일생을 바쳐 / 내 사랑을 생생하게 불어넣기에 / 하루는 너무나 짧다’고 한 이 ‘점’은 데체 무엇인가. 여기에 ‘점새’가 지닌 핵심이 내재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점이란 별다른 언어적 의미나 뜻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런 점을 점지한 시인에게는 사전적인 해석을 넘어 남다른 상징적 그 무엇을 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점새’ 그것은 화가가 갈망하는 삶의 또다른 양식과 변화의 한 존제로서,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이상과 갈구의 절대적인 존재로서 시인이 한 생애를 바쳐 이룩하고자 소망하는 ‘내 사랑’의 화신인지도 모른다.

마치 태양의 빛을 렌즈의 초점으로 모아 원시적인 그 순결 무구(無垢)한 불씨를 구하는 원초적인 사랑의 원형같은 것 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인의 심상의 화폭에 담고 있는 ‘점’은 기쁨니나 행복같은 그런 안주(安住)의 희구나 희기이기 보다는 이상과 꿈이 접목된 ‘내 사랑’을 향한 오늘의 비원이요 기구의 실체가 아닌가 싶다.

캄캄한 네모난 방안에서 점 하나가

그리움이 일렁일 때마다

눈을 뜨고 날아오르는

나의 점새.

‘점새’, 마지막 연에서 강렬하게 표출하는 시인의 육성이 보요주는 그 ‘점’ 하나는 다름 아닌 시인의 분신을 넘어 시인 자신의 화신임이 분명하다. ‘그리움이 일렁일 때마다 / 눈을 뜨고 날아오르는’ 점새는 시인의 갈구만이 아니라 앞서 지적한데로 풍요 속에서도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현대인의 갖가지 소망과 그리움 같은 단절에 대한 소통의 절구가 아닌가 싶다.

각설하고, 좋은 시 한 편을 읽은 후에 갖게 되는 신명나는 이 절창(絶唱)의 시를 통해 한 시인의 시적 성취와 예술혼을 확인하게 되는 것도 독자에게는 큰 얻음이요 즐거움이 되리라 믿는다.

시가 한 시인에 있어 삶의 또 다른 하나의 구원이요. 생의 원동력이나 특유의 가락이라면 아름다운 시를 써는 일은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기도와 다를바 없다.

시인 남정(南汀)의 시를 통한 기도가 화가로서 화폭에 쏟아내는 화필의 열정 못잖게 시에 대한 열정의 풀무질로서 부단히 지속되기를 시를 써는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