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부여 정림사지 [定林寺址]를 찾아서

정로즈 2014. 7. 2. 11:53

2014년 6월28일 대구문협 연례행사의 하나로 문학기행에 참여하여 다녀온 곳을 올려본다.

 

정림사는 백제시대의 사찰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1980년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금당지(金堂址), 중문지(中門址), 강당지(講堂址), 회랑지(廻廊址)등이 확인되었고 또한 석탑 기초의 판축기법(版築技法), 다량의 와당과 격목와(格木瓦) 등이 발견되므로 해서 백제시대의 창건임이 분명하게 되었다.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ꡐ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ꡑ라는 글이 발견되었다. 태평팔년은 요(遼)의 연호(年號)이며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해당된다. 이 문자와의 발견수는 이곳에서 출토된 고려 기와중에 가장 수량이 많았으며 고려 재건시의 정림사를 대표할 수 있는 유물이다. 가람배치형식(伽藍配置形式)을 보면 전형적인 일탑식배치(一塔式配置)로 남으로부터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순서로 일직선상(一直線上)에 세워졌으며 주위(周圍)를 회랑(廻廊)으로 구획(區劃)하였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3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부여 문화재 에서 펌한 것임)

 

 

 

 

사적 제301호.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중건 당시 절이름이 정림사였고, 1028년(현종 19)에 중건되었음이 밝혀졌다. 1979~84년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의해서 절터가 중문·석탑·금당·강당이 남북선상에 일렬로 배치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두른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인 남북일탑식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회랑지 서남 모서리에서 다량의 기와편, 납석제삼존불상, 소조불, 북위시대의 도용(陶俑)과 관련을 보이는 도용의 파편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과 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백과사전에서 펌)

 

심후섭선생님께서 문화해설을 했다.

 

 

 

 백제의 불심 바다를 넘어.....

 

 

 

 

 

 

 

 

 

 

고려세대의 민초들이 신앙의 징표인 불상인데 시대적 변천으로 현재의 형태와 그 시대의 신앙을

생각하게 하는 석불죄상에 관심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