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28일 문학기행으로 백마강에서 바라본 낙화암은 국민학교 때 배우면서 기억에 남은 곳이며
두어번 육로로 가서 부소산을 타고 보았지만 우리의 대중가요를 통한 <백마강 달밤에>라는 노래의 의미를 생각하며
한번은 백마강에서 바라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이제 이루어저 마음이 설례기도 했지만, 왠지 그렇게 옛 자취가
되살아있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또 삼천 궁녀가 꽃잎처럼 흩날리며 산화한 곳이란 하나의 전설이였구나.
생각하게 되었던 서글픈 문학기행이었다.
고란사는 문화재 98호, 99호로 지정되어있으며 불교 사찰로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있다.
고란사 라는 이름은 절 뒤 바위틈에 고란정이 있고 그 위쪽 바위틈에 자라는 고란초가 있다고 하여 고란사라고 한다.
고란사 뒤편 약수터를 고란정으로 하고 절벽의 균열을 방지하기 위해 철재 빔으로 설치돼 있어 옛 고유의 멋을 살릴면서 천연기념물 지정도 심의위에서 신중하게 심의하여 보호막을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옛적에 약수터를 찾아 약수를 마시고 뒷쪽 위를 돌아나올 때 만난던 고란초를 잊을 수 없었다.
옛적에 내가 본 고란초는 이끼가 끼고 그늘이 짙게 드리운 곳에 파랗게 조그만 고란초를 보았을 때 넘 신기하였는데 오늘 본 고란초는 햇볕에 바짝마른 바위틈에 겨우 한포기의 변절된 고란초를 보았을 때의 그 의아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백제 마지막 의자왕은 고란사의 뒷 약수터를 중심으로 움푹파인 바위틈에서 자란 고란초 한잎을 약수에 띄워 마셨다는 유래와 전설이 있다고 하는 고란초를 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백제의 역사의 한면을 읽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고란사 입구 길목을 지키느라 힘들었던 나무의 뿌리를 보면서 나의 느낌을 무엇으로 표현하고 싶어 사진을 찍었다.
낙화암 까지는 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시대 멸망 무렵 인구수가 76만호였기 때문에 3000궁녀라는 말은 조선시대때 어느 선비가 낙화암부근을 지나다 삼천궁녀라는 말이 붙은 시를 읊게 되면서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그 시에서 말하는 삼천은 단지 숫자 3000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민족성인 삼천을 말하는 것이며<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때는 우리 인구가 3000만이었다고 한다.
나는 대중가요를 통하여 백마강도 3000궁녀도 나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낙화암을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직접 낙화암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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