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시인그 여름의 빛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긴 장마기에 접어든 서울은 비구름과 예고없이 쏟아지는 폭우로 늘 축축하다. 열대우림의 우기 같이 줄기차게 내리는 비, 비, 비. 어딘가에 숨어 있던 습기가 바깥으로 밀려나와 팔과
다리에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하얗게 작열하던 여름의 햇볕을 한 달째 볼 수가 없다.
책 한 권을 들고 시원한 카페를 찾아가서 반나절쯤 읽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다가 오후에는 속절없이 나태 속에서 무너지곤 한다. 아아, 돌이킬 수 없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이 여름은 아직도 길게 남았다!
비와 습기, 끈적거리는 더위에 지쳐 사람들은 도시를 떠난다. 여행은 일상을 벗어나 떠나는 일탈이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 다른
행복을 찾으려는 모험의 여정이다.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여행은 ‘모호(模糊)한 방식으로’ 행복을 찾는 삶의 연장(延長)이다. 직장과 업무를 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휴가를 기다리는 것도 여행 때문이다. 여행이 자유를 누리는 시간이 아니라면 누가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이곳저곳을 고생스럽게 떠돈단 말인가! 여행의 선물은 다른 말, 다른 음식, 다른 기후 속에서 존재를 바꾸는 기쁨 그 자체다.
7월이면 인천공항은 이미 해외 여기저기로 떠나는 여행객들로 붐빈다. 나는 터키와 그리스로 떠나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스탄불에서 블루모스크를 둘러보는 것을 시작으로 셀축에서 셀수스 도서관 유적지를, 에페소에서 아르테미스 신전을, 파묵칼레(목화의 성)에서는 하얀 석회붕과 네크로폴리스를,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미노스 문명의 유적지와 크노소스 궁전과 그리스의 국민작가 카잔차키스의 묘지를, 아테네에서 아크로폴리스를 찾아 파르테논 신전, 제우스 신전, 아고라 유적지들을 차례로 둘러볼 작정이다.
16박17일로 예정된 여행의 시간들은 꿈결 같이 흘러갔다. 기억에 남은 것은 에게 해 연안의 비옥한 땅에서 자라는 올리브나무들, 녹색 그늘을 흔들던
바람, 어디에나 넘치는 희디흰 햇빛들…. 이 여행에서 묘약(妙藥) 같은 순간을 맞은 것은 그리스의 산토리니 섬이다. 푸른빛을 머금은 바다와 언덕의 하얀 집들이 보여주는 풍경에 매혹(魅惑)되어 그것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해질 무렵엔 서쪽 끝 이아 마을에서 아름다운 일몰 풍경을 보고, 그 이아 마을의 골목에 있는
영국의 문학도 둘이 만든 작은 서점에도 들렀다. 아틀란티스 서점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젊은이들이 몇 달씩 섬에 머물며 자원봉사를 하고, 여행자들은 책들을 기증한다. 영어로 된 문학·철학·역사 책들이 서가에 꽂혀 있고, 한국 책 몇 권도 보였다. 나는 아틀란티스 서점에서 책 몇 권을 샀다.
이튿날에는 올리브나무 그늘 아래서 에게 해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종일 한가롭게 책을 읽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종일 부는 바람이 차가워서 여행 가방에서 긴 팔 옷을 꺼내 입었다. 저녁에는 산토리니의 번화한 거리로 걸어가서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갈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거리를 구경하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낮에 읽던 책을 마저 읽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우니, 이내 잠이 밀려온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뼛속까지 누린
하루. 아아, 이것만으로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 잠은 깊고 달았다. 잠은 아무 꿈도 꾸지 않은 채 아침까지 이어졌다.
여행은 나태와 온갖 형태의 부동성과 죽음에 대한 모반이요 반동이다. 팔과 다리의
건강함을 과시하며 삶과 꿈을 세계를 향해 뿜어내는 약동(躍動)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여행은 철저하게 산 자의 일이다. 여행이란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사라지는 순간들의 연속인 것을! 육로는 버스로 이동하고, 섬과 섬 사이는 배를 타고 가고, 그보다 훨씬 더 먼 거리는 비행기로 움직였다. 터키의 구름 한 점 없이 투명한 하늘, 에게 해의 푸른 물결, 올리브나무와 월계수와 무화과나무들, 돌무더기로 남은 고대 유적지들, 여러 신전과 이슬람 사원(寺院)들을 돌아보았다.
여행은 먹고 마시는 것에서 약간의 행복과 쾌락을 주고, 그보다 부단히 움직이는 몸의 고단함 속에서 살아 있는 기쁨을 핏속으로 흘려보낸다. 신과 자연에 속하는 것들에게서는 경외감을, 죽어가는 모든 것들에게서는 따뜻한 연민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것이야말로 기적이라는 느낌이 핏속에 녹아든 카페인과 같이 가장 오래 남아 내 존재를 흔들었다. 터키와 그리스의 땅들을 헤매고 다니는 동안, 내 팔과 다리는 강렬한 햇볕에 그을었다. 7월 중순, 에게 해 여행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서울은 여전히 긴 장마를 겪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