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들꽃 그 치열한생명현장 /정병선

정로즈 2018. 9. 8. 10:13

들꽃, 그 치열한 생명현상

1.
일출이 늦어지고 일몰은 빠른 환절(換節)의 시간에 유순(柔順) 해진 빛이 키 작은 여름 꽃 위를 서성거린다. 절정을 지나 옅어져 가는 녹음(綠陰)속에 이름 모를 들꽃들이 다투어 핀다. 햇빛과 토양과 물기만 있으면 꽃들은 핀다. 바위틈에서도 피고, 견고한 아스팔트 도로를 뚫거나, 보도 블럭의 촘촘한 틈새를 비집고 투박한 야생(野生)의 힘으로 꽃들은 피어난다.

2.
초목은 나서 자라려는 생장지심(生長之心)이 있고, 금수(禽獸)는 이에 더하여 지각지심(知覺之心)이 있으며 사람은 이 두 가지 마음에 의리지심(義理之心)이 더 있어 이들과 구별된다고 인간은 자랑한다. 지각(知覺)은 추위와 따뜻함을 알고 살고자 하고 죽기 싫어하는 것들이어서 뭇 생명의 생장노사(生長老死)의 과정에서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의리지심은 천명(天命)의 당연함을 주재(主宰)로 삼아 하고자함이 혹 살려는 욕망보다 더 강한 것이 있으며 싫어함이 혹 죽음보다 심한 것이 있으니 도심(道心)이 바로 그것이라며 뽐낸다.

그러나 인간이 동식물보다 우월함을 칭송한 이 화려한 수사(修辭)는 저 이름없는 들꽃 앞에서 모두가 허사이다. 척박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때가 되면 본능처럼 피어나는 저 들꽃에게 살고자 하고 죽기 싫어하는 지각지심이 어찌 없겠으며, 생명의 소중함을 이르는 천명(天命)의 의리를 몰랐다면 음습한 무명(無明)의 시간을 어찌 견뎌내었겠는가! 저 들꽃에게 생존을 향한 의지는 곧 생장지심이요 지각지심이자 의리지심이었을 것이다.

3.
삶이 곧 모험이자 전쟁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헬 조선’ 이니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수저계급론’ 과 같은 자조 섞인 말들이 유행하고, 출산율 세계 최저, 자살률 세계 최고라는 부인하고 싶은 이 기막힌 기록은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일시적인 고통과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삶을 포기한다. 삶에 수반되는 수고로움을 감내하더라도 보다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으니 출산을 피한다.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다. 참담한 일이다.

4.
주역에서 “낳고 낳는 것이 역(生生之爲易)”이라 하였다. 천지(天地)는 무심하나 음양(陰陽)은 교차하고, 우주는 끝없이 유전(流轉)한다. 그 절대적 섭리 속에서 들꽃이 피고 지듯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피할 수 없는 숙명적 순환을 맞는다.

생각건대, 어지럽고 힘든 세상을 헤쳐 나가는 도는 오직‘생명을 향한 절대의지’하나뿐이다. 하늘이 내린 생명은 인간이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지고(至高)의 절대가치이기 때문이다.

이름 모를 들풀 한 포기, 숨어서 피는 들꽃 한 떨기에서 치열하고 당당한 생명현상을 본다.

경이롭고 숙연해진다. 그리고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