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모임에서 들었다. 60대의 전직 공무원인 지인이 지하철에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지하철을 내리려고 문 앞에 서 있던 20대로 보이는 여성에게 “아가씨! 조금 물러섭시다!’라고 했는데, 난데없이 이 여성이 “제가 왜 아가씨예요? 웃기는 할아버지네요!”라며 쏘아붙이더니 승객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황당하다는 그에게 동석자는 “아가씨라는 말은 우리에겐 자연스럽지만, 요즘 젊은 여성들에겐 차별적인 뉘앙스가 있다. 말조심을 해야 한다”고 한마디 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는 그의 말에 “말을 안 거는 게 상책이다. ‘저기요!’나 ‘선생님!’ 하면 되지 않을까. 아예 영어로 ‘익스큐즈 미’ 하면 어떠냐”고 했다.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수년 전엔 소화제를 사러 약국에 간 여성이 약사에게 ‘언니’라고 불러 곤욕을 치렀다. 약사와 설전이 벌어져 경찰서까지 가는 소동이 빚어졌다. 이런 사례를 접하면 세상이 달라진 걸 실감한다. 우리 사회의 인권과 평등의식이 확산하면서 그간 기성세대들이 편하게 써온 아가씨, 언니 등의 호칭도 이제 때와 장소, 사람을 봐가며 써야 한다.
이런 세태는 이미 특정 직업인의 호칭에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다. 요즘 간호사를 간호원이라 부르는 이는 없다. 의사들에 종속된 낮은 직종으로 비친다는 지적이 제기돼 독립된 전문직이란 의미의 간호사로 바뀐 지 오래다. 운전수는 기사가 됐고, 요즘은 아예 기사님이라 불린다. 때밀이는 이제 세신사 또는 목욕관리사다. 공무원 사회도 변화가 읽힌다. 서울시와 일선 구청에서는 환경미화원이란 호칭을 더는 쓰지 않는다. 공무관으로 부른다.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이들이란 뜻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부모 직업란에 환경미화원이라 써야 하는 이들 자녀의 입장을 살피고, 이들의 직업적 긍지를 심어주자는 의미로 이렇게 바꾸도록 했다. 서울시에선 ‘잡상인’이란 말은 더 이상 없다. 이젠 ‘이동상인’이다.
박태해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
다소 의아스러운 호칭도 있다. 경기·충북 등 광역지자체 공무원들 사이에선 6급 주무관을 차관이라 부른다. ‘차석 주무관’, ‘차기 사무관’을 줄인 것이다. 조직의 팀장급인 6급직에 대한 배려이지만 “정부 부처 차관과 동급이냐”, “오버가 지나치다”는 비아냥도 있다. 그럼에도 호칭이 직업이나 직급의 높낮이와 관계없이 상대가 듣기에 좋게 배려하는 취지로 불린다는 점에서는 봐줄 만하다.
얼마 전에 장애인단체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기자가 쓴 한 인터뷰 기사 본문의 ‘정신지체’란 단어가 부적절하니 ‘지적장애’로 수정해 달라는 것이다. 정신지체란 말에 차별·편견이 담겨 있어 2007년 장애인복지법이 개정돼 ‘지적장애’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때 듣기에도 거북한 지랄병으로 불린 간질(癎疾)은 뇌전증(腦電症)으로 개명됐다. 문둥병, 나병은 한센병으로, 정신분열증은 조현병(調絃病)이 됐다.
박태해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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