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청동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8월 19일까지 열리고 있는 좌혜선 작가의 개인전 ‘가장 보통의 이야기’ 전시장에 들어서니 목탄으로 그린 도시 풍경이 벽을 꽉 채우고 있다. 하나로 연결된 풍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울과 수도권, 제주도에 있는 거리들의 봄, 여름, 가을, 겨울 풍경이 이어져 있다. 161×131cm 크기의 작품 15점을 이어 붙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거리들이 어디나 비슷비슷한 데다 흑백의 그림이어서 하나의 풍경으로 보인다. 한적한 공원에서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사람들,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여성,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는 학생,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남자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여자…. 너무나 흔하고 익숙한 모습이라 방금 지나온 거리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 오톨도톨한 질감의 종이에 목탄으로 그린 그림을 보고 있으니 익숙한 풍경이 점차 특별하게 느껴진다. 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일렁이고,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빗물에 일렁이고, 밤거리 풍경이 분분히 날리는 눈발에 일렁이면서 보는 이의 마음도 함께 일렁인다. 평범한 풍경 속 흔하디흔한 인물들이 궁금해진다.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각자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까?
The Most Ordinary Stories 12_ 2017~2018, Charcoal on paper, 161x131cm |
부조리한 상황에 놓였지만 출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삶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작가는 다양한 사람의 사연을 소설로 쓴 후 소설 속 화자(話者)와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연필로 옮겨 적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필체가 가지각색이다.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소설로 읽고 난 뒤 그림을 보면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그들에게 어떤 이야기, 감추고 싶은 상처가 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까요? 그들의 이야기에 다가서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 그리고 나의 감정에 다가서면서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뜻한 어두움
The Most Ordinary Stories 1_ 2017~2018, Charcoal on paper, 161x131cm |
제주도에서 태어난 작가는 2004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만 생활한 부모님은 그에게 “너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살아”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여리고 예민하고 쉽게 상처받는 아이였다. 걸핏하면 울고 다녀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했다. 그는 읽고 쓰는 일,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풍족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부모님은 그의 그림 공부를 지원했고, 강인함을 키워주기 위해 10년 동안이나 태권도 수업을 받게 해주었다.
The Most Ordinary Stories 6_ 2017~2018, Charcoal on paper, 161x131cm |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저도 당연히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예요. 누군가를 먹여살린다는 게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는 일이더군요. 하지만 도망치지 않고 현실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먹고사는 무게
Riverside_ 2018, Oriental paint on Korean paper, 41x53cm |
“제가 쓴 소설들이 자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모두 어디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평범해 보이는 풍경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죠.”
삶의 무게를 짊어진 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연민이 점차 그의 작품 주제가 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불끈 움켜쥔 손을 풀지 못하는 이유는 지켜야 할 소중한 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균관대 미술학과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대학원 때부터 한지에 분채를 여러 겹 칠했다가 지우는 작업을 했다. 하늘색, 분홍색, 초록색, 살구색 등 여러 색을 겹겹이 칠한 후 닦아내거나 검은색으로 덮었다. 층층이 쌓인 어두움과 한 줄기 빛과 같은 밝음이 공존하는 작품이다. 깊은 색감, 반복해서 칠했다 지워낸 붓질의 흔적에 작가의 상념이 담겼다.
그는 “칠하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작품과 씨름하는 과정이 좋았다”고 말했다. 2010년 첫 개인전 ‘끼니’에서 작가는 주로 부엌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선보이면서 ‘먹고사는 이야기’를 했다. 싱크대 앞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여성의 뒷모습, 벌거벗은 채 냉장고 문을 연 여성의 뒷모습 등을 그린 작품들이다. 누군가를 먹이기 위해 매일같이 반복되는 노동을 감수하는 여성의 뒷모습에서 ‘고단함’, ‘따뜻함’ 등 여러 감정이 느껴진다.
2015년 개인전 ‘낯익은 풍경’에서는 작가의 시선이 바깥으로 나가 지하철역, 한강공원, 버스정류장 등 거리에 있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2018년 개인전에서는 분채 그림과 목탄 그림을 함께 선보였다. 분채 그림 중 골목길을 나란히 걸어가는 초등학생 형제를 그린 작품 〈형아〉에서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제가 그림을 가르친 아이들이에요. 동생이 항상 형의 책가방을 붙잡고 걷는 모습이 예뻐 보였습니다.”
활짝 핀 꽃을 발견한 중년 남성이 가던 길을 멈추고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 〈출근길〉을 보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결혼을 앞둔 작가는 “‘결혼생활과 작업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라면서 걱정해주시는 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삶이 어렵다 해도 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맞서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결혼으로 공감대가 더 넓어지면서 그의 작품세계가 더욱 풍성해지지 않을까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