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산지등대에서 -허유미 -

정로즈 2020. 4. 3. 12:03



백 년 등대 산지등대에서 고백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해서

저녁 일곱 시 산지등대로 나와 줘
메시지 보내고 너를 기다렸는데

바다를 열 번 접었다 펴도 안 오고
별을 다 헤도 안 오고
못 온다는 연락도 없고
빨리 오라 전화하려니 부끄럽고

한쪽 볼에 시린 밤 꽉 물고
다른 한쪽 볼에 너의 이름 꽉 물고
달을 따라 서쪽으로 기우는 눈물 닦으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면

꺼진 등대 아래
머뭇거리던 발자국이
낙서처럼 흩어진다

허유미의 ‘우리 어멍은 해녀’ 중

저 시를 읽고서 인터넷에 ‘산지등대’를 검색했더니 이런 글이 눈에 들어왔다. “제주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제주시 사라봉 등성이에 우뚝 솟은 산지등대는 제주 북부를 항해하는 배들의 좌표로 이용되고 있다.” 즉, 시인은 제주 바다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산지등대에서 사랑의 길을 묻고 있는 셈이다. 시인은 저녁 7시에 등대로 나와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당신은 오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미련 탓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산지등대’가 실린 ‘우리 어멍은 해녀’는 제주 모슬포 바닷가 마을에서 자란 허유미 시인의 첫 시집이다. 비릿하면서도 청량한, 제주의 바닷바람이 담긴 듯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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