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제 답 사

박팽년

정로즈 2022. 7. 17. 13:52

박팽년

 

2019년 6월4일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소재 육신사, 태고정, 삼가헌(하엽정), 하목정을 살펴보고 왔다.

1456년 단종복위운동을 펼쳤던 형조참판 박팽년(호: 취금헌) 선생은 다른 사육신과 함께 3대가 멸문지화를 입었다. 이조판서인 아버지 박중림, 4형제(인년, 기년, 대년, 연년), 그의 아들(헌, 순, 분)등 9명이 죽임을 당했으니 후손이 없는 게 당연하지만 기적이 일어나 대를 이을 수 있었으니 순천 박씨로서는 감동이었으리라. 사연인즉 취금헌의 둘째 아들 순의 부인이 임신 중이었고 아들이면 죽임을, 딸이면 노비를 삼으라는 명이 떨어졌는데 마침 아들이었고, 몸종이 딸을 낳았는데 바꿔치기로 둘 다 살리는 기지를 발휘해서 이름조차 박비(朴婢)로 행세했다. 세월이 흐른 후 박비의 이모부 이극균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해서 조정에 건의하여 용서를 받고 박비는 박일산(朴壹珊)으로 성종이 내린 이름과 사복시정이란 벼슬까지 얻어 이곳 묘골에 터를 잡고 대를 이을 수 있었다. 순천박씨 원시조는 견훤의 사위 박영규인데 나중에 계보를 잃었고, 고려 후기 보문각 대제학과 경상도체찰사를 지낸 박숙정을 시조로 삼고 있다.

취금헌이 세조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을 때 “네가 충청감사로 있으면서 올린 장계에 신(臣)이라 했거늘 지금 와서 어찌 내 말을 거역하느냐?” 이에 취금헌 왈 “한 번도 臣자를 쓴 일이 없습니다.” 장계를 뒤져보니 臣자를 써야할 곳에 巨자가 표기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세조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고 단종을 유일한 왕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한 분이었다. 또한 취금헌 형제들이 아버지와 함께 죽음을 맞으며 울며 고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려 함에 효에 어긋납니다." 하니, 박중림 선생은 "임금을 섬기는데 충성하지 못하면 효가 아니다." 라며 태연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충효가 별개가 아님을 일깨워 주는 일화이다.

 

취금헌의 현손인 박계창이 고조부 제삿날 꿈에 사육신 여섯 명이 문밖에서 서성대는 것을 보고 깨달은바가 있어 다섯 분 신위도 함께 모시게 되었고 육신사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입구에는 육신사 현판이지만 사당에는 숭정당(崇正堂)이다. 취금헌의 아버지 박중림 선생도 함께 모셨기 때문이라는데 막상 사당을 참배해보니 박중림 선생 사당은 우측 언덕 위에 따로 모셔두었다. 왕조시대가 끝나고 세월이 흘러도 사육신에 대한 우리들 마음은 한결같으니 이런 전통을 살려 약자를 배려하고, 언제나 정의 편에 서며, 옳은 일에 앞장선다는 마음가짐은 계속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태고정(太古亭)은 1479년(성종 10년) 박일산이 세운 것으로 보물(제554호)로 지정된 귀한 문화재다. 정면 4칸, 측면 2칸, 마루와 방 둘에 부엌까지 딸린 집이다. 오른쪽은 팔작지붕, 왼쪽은 맞배지붕에 부섭이 딸린 특이한 구조이며, 기둥 위에 초익공으로 장식했고, 두리기둥에 약간의 배흘림이다. 그 앞쪽으로 1778년 대사성을 지낸 박문현의 살림집 도곡재(陶谷齋)는 시 지정 유형문화재(제32호)다, 이밖에도 문화재 반열에 오르지 못했지만 충효당을 비롯한 고건물들이 새로 지은 집들과 조화를 이루며 묘골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삼가헌(三可軒)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옛 선비들이 어떤 가옥에서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곳이라 국가민속문화재(제104호)로 지정되었으며 대구에서는 6점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을 뿐인 귀중한 곳이다. 1769년(영조45년) 취금헌의 11세손인 박성수(가선대부 이조참판)가 건립하여 자기 호를 따서 삼가헌(三可軒)이란 현판을 건 곳이다. 삼가란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 있고(智: 슬기),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으며(仁: 어짐),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도 있지만(勇: 용기) 중용은 불가능하다.”란 ‘중용’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 집을 더욱 빛내는 것은 미수 허목 선생이 쓴 “예의염치효제충신(禮義廉恥孝弟忠信: 예절, 의리, 청렴, 부끄러움, 효도, 공경, 충성, 믿음)이란 전서체 글씨다. 미수 선생이 삼가헌 선생보다 140년이나 뒤에 출생했는데 어떤 연유가 있어 여기에 걸렸는지 궁금하지만 가로로 길게 쓴 글씨체가 독특해서 쉽게 읽지 못했지만 선인들이 금과옥조로 삼던 가르침이 아니던가. 이 집은 초가로 된 중문채가 있어 더욱 시선을 끈다. 바깥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공간으로 여기를 통해야 안채에 이른다. 자그만 방앗간과 헛간으로 되어 있다.

별당은 담하나 사이 ㄱ자 집으로 서당(파산서당)으로 쓰던 곳인데 개축하면서 돌출된 누마루를 덧붙여 하엽정(荷葉亭)이 되었고, 네모진 연못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둔 연밭을 만들어 전통정원을 꾸렸다. 연꽃이 피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여 약간 스산한 느낌이다. 2층 돌출부분인 누마루에 올라 연밭을 본다. 우리 선조들은 이런 운치있는 곳이라면 으레 시 구절이 줄줄 흘러나올 텐데 무딘 입이 야속하기만 하다.

올해는 3.1독립만세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뜻깊은 해다. 최근 ‘대구독립운동유적지 100곳“(정만진 지음)이란 책이 출판되어 참고할 만한데 이곳도 그 중 하나에 포함된다. 취금헌 선생 후손인 박용규(朴龍圭 1906년∽ )의 집이 묘리 805로 삼가헌 지번(묘리 800)과 이웃한다. 3대 독립운동의 하나인 1926년 순종 인산일(6월 10일)을 맞아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박용규는 다른 친구들과 뜻을 모아 독립만세를 불렀고, 격문 5만 장을 만들어 뿌렸으며,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300명의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1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 갇히기도 했었다. 이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몇 몇 어르신들을 만나 물어봤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게 아쉽다. 박용규 선생도 자라면서 삼가헌을 통해 선조들의 뜻을 깊이 새긴 분이리라. 1960년 2.28민주학생운동도 대구의 고등학생이 주도한 것이 박용규의 독립정신, 불의에 굽히지 않는 정의감이 면면히 흘러 이루어진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역사는 피 끓는 젊은이가 창조해야 마땅하다.

마지막으로 하목정(霞鶩亭: 대구시유형문화재 제36호)을 찾았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 다행이었다. 이 정자는 임란 때 의병대장을 지냈고, 현감을 지낸 전의 이씨 이종문(李宗文)이 지은 집이다. T자형이고 대청마루가 넓으며, 민흘림두리기둥에 초익공으로 장식했으며, 한옥의 버선코(물매곡선)의 아름다움을 여기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구조다.(사진참조)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을 지나다가 낙동강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쉬어갔다고 한다. 그 이름조차 ‘지는 저녁놀에 외로운 따오기가 가지런히 나르는’ 뜻을 갖고 있어 눈길이 한 번 더 가는 곳이다. 대구에도 이런 곳이 있음을 고맙게 여길 뿐이다.

'문화제 답 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상감영공원 소재 비석 소개  (0) 2022.07.17
구연서원을 찾아서  (0) 2022.07.17
진주성  (0) 2022.07.17
나주읍성에서 불화사로  (0) 2022.07.17
구형왕릉과 동의보감촌과 남명기념관  (0) 2022.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