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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꾸는 꿈-곽재구

정로즈 2016. 1. 25. 16:45

詩가 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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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시인, 순천대 교수

누군가 내게 묻는다. 어떤 시(詩)가 좋은 시인가? 40년 넘게 시를 써왔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늘 군색하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알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 방법을 좇아 쓸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문학청년이 밤을 새워 끙끙 앓지 않아도 될 것이고, 신춘문예도 대학의 문예창작과도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질문을 한 이가 어떤 시를 좋아하세요 하고 되묻는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내가 좋아하는 시는 마음을 움직이는 시다. 마음은 인간 영혼의 고향을 이르는 말이다. 인간의 하루를 설레게 하고 미래를 꿈꾸는 모든 시간이 마음에서 비롯된다. 마음이 어질고 지혜로운 인간의 세계는 살기 좋은 세계가 될 것이며, 마음이 흉하고 어지러운 곳의 삶은 난해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라 할 것이다.

시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인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1980년대. 한국 현대사의 정치적 고통이 정점에 이른 그 시절, 많은 한국인이 시를 사랑했고 시를 썼다. 화염병과 페퍼포그, 임의동행이 일상이던 그 시절 한국인들은 절망 속에서도 시가 지닌 순정한 이데올로기를 사랑했다. 저항과 꿈, 자유와 사랑, 더 좋은 세상을 향한 집착. 젊은 대학생들은 신동엽의 ‘금강’이나 김지하의 ‘황토’ 같은 불온한(?) 시집들을 필사해 읽었다. 발견되면 바로 군에 징집되거나 감옥에 가야 했다.

버스 안내양, 광부, 목수, 미싱공, 철근공들이 자신의 삶을 노래한 시들을 썼고 시집을 내기도 했다. ‘반시’ ‘오월시’ ‘시와 경제’ ‘시운동’ 같은 젊은 시인들의 시 동인지가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고 문단 등용문 역할을 했다. 시와 삶이 손을 잡고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으니 세계 지성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 할 것이다. 이 시절을 생각하면 시 쓰는 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뜨거워진다.

열흘 전 거문도에 들어갔다. 유채와 동백꽃, 수선화가 함께 핀 섬은 이미 봄이었다. 그곳 마을회관에서 우연히 거문도 주민들이 모여 만든 마을 밴드를 만날 수 있었다.

밴드의 이름이 ‘등대’였다. 낮에는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고 밤이면 틈나는 대로 모여 밴드 연습을 한다고 했다. 민박집 주인, 양식업자, 택시 기사, 해풍쑥 판매업자, 집을 짓는 이가 한데 모여 드럼과 전자피아노, 기타, 색소폰 같은 악기들을 멋지게 연주했다. 육지에서 115㎞ 떨어진 먼 섬마을에 밴드를 만들고 자신의 삶을 즐기는 이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이곳이 한국의 섬마을이 아니라, 유럽의 어느 세련된 예술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등대’에서 베이스기타를 담당하는 김경환(49) 씨를 만난 것은 기쁨이었다. 26, 27년 전 그가 군대생활을 할 때 어머니가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에 어머니는 시 한 편을 적었는데, 그 시가 부끄럽게도 나의 시였다고 했다.

1980년대 말, 가난한 한국 섬마을의 한 어머니는 군대 간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이 읽은 시 한 편을 적어 보냈으니 그 무렵 한국인의 시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거듭 내 이름을 확인했고 그와 나는 기억 저편의 손 하나씩을 내밀어 따뜻이 악수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편지를 썼던 때가 지금 자신의 나이보다 한 살 더 적은 때였다고 그가 돌이켰다.

그날 밤 민박집의 창을 열고 잠자리에 들었다. 파도 소리가 어머니의 자장가처럼 나직하게 귓전에 다가왔다. 날이 새는 대로 그의 어머니를 찾아갈 생각을 하니 쉬 잠이 오지 않았다.

40년의 세월을 시를 쓰며 보냈다. 시가 인간의 마음 안에 한 숟갈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살았지만, 그런 시가 내게 있느냐 물으면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쓴 시와 산문, 동화들을 다 합쳐놓아도 윤동주의 ‘서시’나 ‘별 헤는 밤’ 한 편에 미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날이 새면 그이에게 물으리라. 어떤 시를 아들에게 적어 보내셨는지? 내 시 가운데 어느 한 편이 궁핍한 시절의 어떤 이에게 마음의 양식이 됐을 수도 있다 생각하니 지난 40년 세월이 물거품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드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이가 사는 동네에 이르러 아들이 일러준 번호로 전화를 했다. 시 쓰는 아무개입니다. 뵙고 싶습니다. 마음을 다해 따뜻하게 얘기했을 때 그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제 다 늙은 할머니입니다. 예전엔 시를 좋아했지요. 지금은 산밭에서 쑥을 캐고 바다에서 해초를 따며 보냅니다. 이제 다 늙어 시도 읽지 못합니다. 너무 부끄러워 만날 수 없습니다.”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이날 그이를 만나지 못했다. 그냥 그이의 뜻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40년 이상 시를 쓰며 혹 누군가에게 한 줄 마음의 양식이 됐을 수 있는 시 한 편을 얻게 될지 모른다는 꿈은 사라졌다. 젊은 시절 시를 읽고 나이 들어 쑥을 캐니 아름답지 아니한가. 시가 꿈꾸는 이상의 세계가 한 촌부에 의해 이뤄졌다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는 것이었다.

여수로 돌아오는 뱃머리에서 사라지는 섬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십 년이 지나면 내가 지금 그이의 나이가 되리라. 그때 다시 한 번 거문도를 찾아 그이의 손을 잡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