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오늘 / 구상

정로즈 2020. 5. 19. 09:46

[詩想과 세상]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구상(1919~2004)

구상 시인은 2004년 5월11일에 작고했다. 한국전쟁의 체험을 다룬 연작시 ‘초토의 시’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화가 이중섭과는 친분이 두터웠는데, 이중섭은 청빈한 구도자였던 구상 시인의 인품을 높이 사서 자신보다 연하(年下)이지만 구상 시인을 ‘형’으로 불렀다.

구상 시인은 한 문예지에서 기획한 미리 쓰는 가상 유언장에서 “오늘이 영원 속의 한 표현이고, 부분이고, 한 과정일 뿐”이라면서 “오늘에서부터 영원을 살자”라고 썼다. 이 시에서도 시인은 오늘의 시간을 “신비한 샘”에 비유하면서,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자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란 마음을 비우고, 허욕(虛慾)이 없이 마음을 스스로 가난하게 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가톨릭을 신앙했지만 불교를 함께 공부하는 등 시인의 시는 넓고 큰 정신의 영역을 향해 늘 열려 있었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흔쾌히 사재(私財)를 내놓았던 당대의 어른이었다

경향신문[詩想과 세상]문태준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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