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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두 모녀의 (恨)

정로즈 2011. 1. 28. 09:08

 

한복, 두 모녀의 (恨)

 



                         한복, 두 모녀의 (限)
                                                  이 영 희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





어머니에겐 한복이 恨이었다면

내게는 한(限)없는 도전이었다

어머니에겐 한복이 恨이었다면

내게는 한(限)없는 도전이었다

한국 옷과 음식이 세계의 환호를 받는 일

내 욕심이 과욕인지

오늘밤 꿈 속에서 어머니에게 여쭙고 싶다"


어머니의 설 준비는 딸이 입을 색동저고리를 지어 반닫이 위에 곱게 개켜 놓는 일로 시작했다. 어머니는 솥에 풀을 쑤고 천에 풀을 먹여 그늘에 널어두고, 밤이 이슥하도록 "다닥, 다닥" 방망이를 두드리셨다. 아이 다섯을 홍역 등으로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어머니는 어렵게 얻은 무남독녀의 옷을 한 땀 한 땀 지으며 남편의 빈자리까지 메워갔다.

아버지는 늘 바람처럼 떠돌았다. 한량이던 아버지는 가끔 집에 들렀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색도 하지 않고 남편이 돌아올 무렵이 되면 정성껏 옷을 지어 내놓았다. 계절에 따라 명주나 모시로 두루마기를 새로 지어 풀을 먹여 입혀 드렸다. 아버지가 새 옷처럼 빳빳해진 두루마기를 입고 "사각사각"소리를 내며 집을 나설 때면, 어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곤 하셨다.

만석꾼의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키가 크고 인물이 출중했고, 할아버지의 뜻대로 법원에서 일했다.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을 삭이던 아버지는 어느 날 파면당하고 말았다. 이후 아버지는 세상을 등진 사람처럼 떠돌아다녔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내게 사계절 내내 한복을 지어 입히는 걸 낙으로 삼으셨다. 어머니는 열살이 되어서도 동정을 제대로 달지 못하는 내게 종아리를 걷으라고 하셨다. 동정만 제대로 달면 한복을 오래 입을 수 있기에, 동정 다는 솜씨만은 있어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우리가 살았던
대구 삼덕동 집 마당에 계절 따라 각각 달리 피는 꽃들을 심으셨다. 그것들은 색깔을 만들어내는 색의 마술사였다. 봉숭아꽃, 치자, 포도, 감, 애기똥풀 등 자연이 내린 세상의 색들이었다. 내가 입고 싶은 색깔을 정하면 어머니는 직접 꽃잎을 따서 나와 함께 찧곤 하셨다. 흰색 천에 서서히 꽃물이 배어들면 그늘에서 말렸다. 풀물에 담가 조물조물 만지고 꾸덕꾸덕해지면 수건에 말아 밟곤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9년. 그렇게 애지중지한 딸은 어머니의 닮은꼴로 살고 있다. 어린 나이에 시집 가 뒤늦게 한복에 눈뜨게 된 것은 바로 어머니 덕이었다. 한복을 만들어 누군가에게 입혀 주던 어머니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늘, 뭐든지 잘 해낼 거라 믿던 그 어머니였다.

하지만 고단한 적도 많았다. 가시도, 넝쿨도 많았고 가끔은 미로를 헤매야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께 힘을 달라고 빌었다. 신기하게도 새로운 용기가 생겨났다. 어쩌면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한복에 더 몰두했는지 모르겠다.

한복의 좋은 색깔을 얻기 위해 나는 전국을 돌았다. 강화에서는 옛 관복 한벌을 얻기위해 다섯 번이나 종갓집을 찾아갔다. "이 옷을 갖고 있으면 혼자 보지만, 제게 주면 한복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겠다"고 달랬다. 군산에선 옛 양단(색실로 여러 무늬를 놓아 짠 고급 비단), 안동에선 종이로 만든 수의 등을 찾아냈다.

프랑스 파리에 갔더니 사람들이 한복을 '코리아 기모노'라고 부르고 있었다. 1995년 그 도시에서 열린 '한복' 전시회에서, "한국에는 고유한 한복이 있다"고 나는 외쳤다. 어머니와 내 인생을 모두 바친 한복이 기모노로 불리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프랑스 기자들은 "바람이 불면 아름다운 옷"이라며 한복을 '바람의 옷'이라 이름지어 주었다.

돌이켜보니 한 가지 일에 30여 년 이상을 매달려왔다.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나처럼 '호기심 천국'으로 불릴 정도인 사람이 어떻게 한복 하나에 온 인생을 바쳤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곰곰이 들여다보면 내게 한복은 '하나'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한복은 '세상의 모든 색깔들'만큼이나 많았다.

그 영향인지 고객을 만나건, 모델을 만나건, 어느 나라의 최고 통치자를 만나건 나는 그들만의 색깔을 찾는 버릇이 있다. 디자이너란 어느 개인의 고유한 '색'을 찾아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국제영화제에 설 여배우의 한복은 한국의 예술적 감각과 시상식의 화려함을 살려주고, 결혼식의 한복은 두 집안의 조화로움과 주인공들의 행복함을 고려한다. G20 같은 국가의 큰 축제에는 나라의 품격을 높일 색깔과 디자인이 필요하다.

어머니에게 한복이 '한(恨)' 자체였다면, 한복장이인 내게 그것은 '한(限)없는 도전'이었다. 사람들은 내게 '이제 많이 이뤘으니 인생을 즐기라'고 한다. 사실 나는 요즘 더 초조하다. 남은 꿈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옷과 한국 음식이 세계의 환호를 받는 일, 일흔 넘은 나이의 이 욕심이 과연 '과욕'인지, 오늘 밤 꿈 속에서 어머니에게 한번 여쭤보고 싶다.